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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10년 늦은 여자#4

난임은 병이 아니에요. 하지만 마음을 병들게 하죠.

by 시휴

나는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20대 이후 늘 동안이었다. 어려 보이는 게 일상이었고 누군가 나를 내 나이로 보면 충격받을 정도였기에 사실.... 철이 없었다. 늘 동생들과 어울렸고 연하만 사귀었으며 오빠들을 꼰대(?)로 알았다. 그런 내가 연상(비록 1살 차이지만)과 결혼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오빠"와 결혼한 것은 간단하다. 연하보단 연상이... 결혼할 준비가 된 남자였던 것.


"여성 여러분! 결혼을 하고 싶다면... 연상을 만나세요. 연하보다는 확률이 훨~씬 높아요!!"

(이런 당연한 사실을 30대 중반에야 깨우쳤으니... 나는 진정 남들보다 10년은 늦은 여자였던 게 맞는거다)


아무튼 나는 나의 자궁도 겉모습처럼 당연히 젊을 줄(?) 알고, 35세가 넘어가면 자궁의 기능이 현저히 감소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혼만 하면 당근 임신이 짜잔~ 하고 될 줄 알았다가 1년이 넘어가자 초조해진 상태가 된 것.


일단 불임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불임 병원에 다니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를 다녔지만 (5년을 넘게 다니고 실적도 많이 냈었기에, 또 팀장이었기에 가능했다. 일반 사원이었다면 사표를 내야 했을 듯) 엄청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너무나 우울했다. 인공수정을 하고... 실패하고... 병원에 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간절함과 좌절감이 내 모습같아 더욱 우울해지고 괜히 임산부만 보면 짜증이 나면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인공수정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더라. 일반주사 맞는 것도 싫어하던 내가 주사들을 한 뭉텅이로 받아와서 매일매일 내 배에 꽂아 넣었으니 스스로도 모멸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공수정 3회는 다 실패로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시험관뿐이었다. 시험관.... 지금은 나라에서 대주기나 하지. 그땐 1회에 돈 300만 원이었다. 헉. 월급!


그래서 불임 병원을 일단 끊고 한약을 먹었다. 용하다는 곳을 찾아 수원까지 갔다. 그 한약 덕분인지 나는 임신을 한 거다. (얏호~ 거길 동네방네 소문냈다. 몇 분은 가셔서 드셨을 수도...) 그런데 수정은 했는데 착상이 안된 것인지 6주? 7주 만에 나는 화장실에서 수정란을 보내야 했다. 그 날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분명 미치거나 상을 당한 여자라 했을 거다. 정말 그렇게 펑펑 운 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또다시 원점.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약을 또 먹었다. 그런데 약효가 다 한 건가... 이번엔 소식이 없다. 운동을 시작했다. 뒤돌이켜보면 나는 참 간절했다. 그럼에도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음. 당연하다. 어떻게 회사를 그만두겠는가...?


나를 너무 안타깝게 여긴 엄마가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같이 그 산부인과를 갔다. 이번엔 금천구다. 그냥 허름하게 생긴 산부인과에 나는 크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분이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궁벽을 얇게 걷어내는 수술을 하자는거다. (나중에 들어보니 소파 수술하고 비슷하다고 하네요) 자궁벽이 울퉁불퉁해서 착상이 안될 수도 있다면서... 그럴 경우에는 시험관을 하더라도(시험관은 수정만 도와줍니다) 별반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고요.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뭘 해도 좋았다, 임신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오케이를 하고 수술 날짜를 잡고 다음번에 병원을 갔는데 앗?! 그때 기적적으로 임신이 되어 있었던 것.


암튼... 돈은 굳었다.


내 아기의 태명은 호강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호강시키다니.... 그래서 난! 호강맘!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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