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소설 번역 2

출판 번역으로 이어진 샛길

by 정시체

비록 서브 컬처지만 라이트노벨도 엄연히 문학의 한 장르였고, 내게는 출판 번역으로 이어진 작은 샛길과도 같았다.


출판 번역가로 진로의 방향을 잡고 번역가 모임 카페를 비롯해 여러 출판 관련 카페에 가입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번역을 하다가 한숨 돌릴 때면 가입해 둔 카페에 들어가 다른 번역가나 출판 관계자들이 올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일하는 이야기를 읽곤 했다. 주변에 동료가 없었는데, 그런 식으로나마 함께 일하는 듯한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카페마다 구인 구직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자유 게시판만큼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어쩌다 올라오는 글도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거나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일본어 프리랜서 번역가를 구한다는 글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별생각 없이, 습관처럼 각 카페의 게시판들을 살펴보곤 했다. 어쩌면 나와 조건이 맞는 공고가 올라올 수도 있다고 조금 기대하면서. 소설 번역 일감은 그러다가 구한 것이었다.


공고를 올린 곳은 도서뿐만 아니라 만화, 게임 등 여러 문화 콘텐츠를 취급하는 중견 회사였다. 라이트노벨 레이블을 새로 런칭하고 전자책 사업을 확장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번역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원래 출판 번역 공고는 잘 올라오지 않는데, 운이 좋았다. 만화 번역에 지쳐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그 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했다.


이력서의 경력 사항란에 그때까지 번역한 만화책의 제목을 쭉 썼다. 포트폴리오로는 대학원 시절 습작으로 번역했던 에세이 일부를 첨부했다. 무작정 원서를 사다가 통째로 번역한 후, 책의 꼴로 편집까지 마쳐 둔 작품이었다. 여러 출판사에 출간 기획서와 함께 샘플 번역을 돌리면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했던 작업이지만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포트폴리오로 쓰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번역 실력과 문장력을 가늠하는 데는 아무래도 만화보다는 에세이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나씩 놓고 봤을 때는 별것 아닌 경력도 모아 놓으니 그럴듯해 보였는지 모른다. 서류가 통과되었다. 샘플테스트도 합격했다. 번역 계약서를 쓰기 위해 직접 회사를 방문했다. 집에서 멀었기 때문에 가느라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흔쾌히 갔다. 회사 분위기와 같이 일할 사람이 궁금했다. 얼굴을 보면 관계가 더 돈독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때 만난 편집자는 일 년이 채 가기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편집자에 따르면 내부 사정 때문이라고 했는데, 퇴사한 것 같았다.


소설 번역은 마감 기한이 길어서 좋았다. 만화는 일주일에 두 권은 번역했는데, 소설은 한 달에 한 권꼴로 번역했다. 280쪽 내외의 단행본이라 분량이 꽤 많았다. 마감이 일상인 삶을 살다가 한 달에 한 번 마감하니 살 것 같았다, 어차피 거의 매일 하루 종일 번역에 매달리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였다. 회사와 자주 연락을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좋았다. 내가 번역 일을 하려던 이유도 직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기 싫다는 철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 하는 일이 체질에 맞았고, 혼자 두면 알아서 할 수 있었다. 마감일이 한참 남았다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마감을 어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설 번역은 만화 번역보다 단가도 더 높았다. 이것은 단순히 만화보다 글자 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었는데, 어쨌든 한 권에만 집중해도 목돈을 쥘 수 있으니 만화 번역 때와 같은 강도로 일하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이번 달에는 이 한 권만 번역해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했다. 물론 만화라도 한 달 동안 수많은 작품을 번역하면 적지 않은 번역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돈을 더 벌겠다고 더 많은 권수를 번역하기 위해 매분 매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은 체력 소모가 심하다.


만화 번역이라고 해서 결코 소설 번역보다 쉽지 않다. 대사 위주라서 쉽게 읽히고 글자 수도 적지만, 굉장히 함축적이기 때문에 숨은 맥락을 파악해 살리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말풍선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글자 수도 맞춰야 한다. 그래서 만화를 번역할 때마다 ‘내가 이 돈을 받고 왜 이걸’이라는 생각이 왈칵 치밀어 오르곤 했다. 네 컷 만화 모음집을 번역할 때 그 생각이 절정에 달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푸념에 불과하다. 나는 모든 분야, 모든 장르를 사랑한다. 어떤 작품이든 다 감사한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소설 번역 회사와의 인연은 일 년 남짓 이어졌다. 한 권 끝나면 다음 권, 하는 식으로 한동안 일감이 계속 주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의뢰가 끊겼다. 기다리다 못해 편집자에게 더는 일감이 없는 건지 문의했다. 답변을 받긴 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납득이 가는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여간에 클라이언트와 외주 노동자 사이의 ‘돈독한 관계’ 따위는 허황된 기대일 뿐이었다. 회사의 사업은 언제 어떻게든 변동되거나 중단될 수 있었고, 담당자는 자주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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