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소설 번역 3

급격한 시장 변화, 단가는 고정

by 정시체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소설 번역 회사에서 간만에 연락이 왔다. 내게 다시 라이트노벨 번역을 맡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마지막 일감을 납품한 때로부터 이미 반년쯤 지난 뒤였다. 그 사이 편집자가 또 바뀐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업체의 일감이 끊긴 직후 일찌감치 돌파구를 찾아 이미 다른 라이트노벨 레이블에서 번역을 하고 있었다. 몸이 두 개가 아니고 뇌도 하나뿐이므로, 두 권을 동시에 번역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고사했다.


소설 번역 회사로부터 갑자기 일감이 끊겼을 때, 그 회사 하나만을 바라보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일감을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 내가 번역한 라이트노벨 작품이 꽤 모인 시점이었다. 비록 마이너한 분야인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더 마이너한 장르인 BL 레이블의 작품을 번역했기 때문에 제목을 말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겠지만, 다른 라이트노벨 레이블로 건너가기 위해 이력서의 경력 사항란을 채우는 데는 충분할 것 같았다.


라이트노벨 레이블을 보유한 메이저 만화 출판사에 다짜고짜 연락해서 이력서를 보낼 테니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식으로 이력서를 돌리고 샘플테스트를 받은 끝에 다른 레이블에서 다시 라이트노벨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약 6년에 걸쳐 출판사 두 곳에서 라이트노벨만 쭉 번역했다. 번역을 마치면 바로 다음 일감이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는 번역을 마치기도 전에 그다음, 다다음 일감이 들어왔다. 하나를 번역하는 동안 다른 일감들이 순서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번역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일감이 끊길 걱정이 사라지자, 본성인가 싶을 만큼 청년 시절 내내 떠나질 않았던 불안도 조금 누그러졌다.


알고 보니 라이트노벨은 꽤 매력 있는 분야였다. 나는 워낙 이야기 금사빠라 원래도 거의 매 작품마다 스토리에 젖어 들고 등장인물에 빠져드는데, 라이트노벨 가운데 괜찮은 작품이 정말 많았다. 설정의 치밀함이나 글의 짜임새가 결코 일반 문학에 뒤지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어떤 작품은 일본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어 만화화, 애니화가 되기도 했다. 번역을 하다가 그런 작품을 만나면 번역가로서 뿌듯하고 보람이 있었다. 내가 낳은 자식이 잘나가는 모습을 본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불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하는데 라이트노벨 번역 단가는 오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오를 것 같지 않았다. 갓 라이트노벨 번역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한 권만 번역해도 만화 여러 권을 번역한 것과 비슷한 번역료를 받을 수 있어서 나름대로 만족했는데, 사실 그 번역료도 최저임금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혹시 앞으로 단가를 올려줄 계획은 없는지 편집부에 종종 문의해 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항상 회의적이었다. 너무 단칼에 거절당해서, 혹시라도 내가 상식에 어긋나는 요구를 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 보기도 했다.


번역가로 일하는 동안 독립하지 않고 본가에서 생활했다. 그동안은 집세가 들지 않아 버틸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부모님 집에 얹혀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고,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풍문으로 듣자니 만화나 라이트노벨 분야는 유독 번역료가 낮다고 했다.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라이트노벨을 번역하면서도 다른 분야로 넘어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하지만 비주류인 라이트노벨과 대중적인 일반 도서 사이에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불안 요소는 또 있었다. 한국에서 웹툰에 이어 웹소설이 급부상하면서 일본 라이트노벨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매달 몇 작품씩 활발하게 라이트노벨 신간을 내놓던 몇몇 출판사에서 점점 작품수를 줄이더니, 아예 신간을 내놓지 않게 되었다. 내가 거래하던 출판사에서도 눈에 띄게 작품수를 줄이는 추세였다. 그 대신 한국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레이블이 생겼다. 다른 출판사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번역료가 낮은데 시장까지 축소되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졌다.


K콘텐츠를 수출하는 시대를 맞아, 앞으로는 번역의 방향을 일본어→한국어에서 한국어→일본어로 전환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다. 언제부터인가 구인 구직 사이트에서 번역가로 검색을 하면 온통 웹툰, 웹소설, 게임, 드라마 등의 현지화 인력을 찾는 글만 수두룩하게 떴다. 그러나 한국어 네이티브로서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서도 매 순간 어려움을 느끼는 마당에, 일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 절대 일본어 네이티브처럼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일본어로 번역하는 단가가 한국어로 번역하는 단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한국어로 번역하는 편이 번역 효율도 높고 퀄리티도 훨씬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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