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라이트한 세계 너머로 1

목표를 재탐색합니다

by 정시체

번역을 하면서 만난 작품이 모두 다 고맙고 소중했다. 덕분에 번역가로서 역량을 키우고 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아직도 한 작품 한 작품이 모두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달리 애틋했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유달리 괴로웠던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나서 모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기에, 어떤 작품이든 마음 놓고 그리워할 수 있다.


처음에는 어떤 작품이 됐든 번역을 해 보는 게 목표였다. 번역으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번역료가 얼마든 상관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뭐든 닥치는 대로 번역했다. 대부분 전자책으로만 출간되는 19금 콘텐츠였다. 그렇다 보니 어느새 ‘19금 전차책’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아무래도 번역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 자신의 이름이 박힌 책이 시중의 주요 서점에 쫙 깔리는 때가 아닐까. 번역가로 이름을 알리고, 또 공들여 번역한 작품이 비로소 여러 독자들과 만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번역서는 전부 전자책으로만 서비스되어 시중의 서점에서는 전혀 접할 수 없었다.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다운받아 전자책 리더나 스마트폰으로만 볼 수 있었고, 또 어떤 책은 일반 인터넷 서점에도 없어서 웹툰, 웹소설 위주의 특정 플랫폼까지 찾아가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겨우 도달한 뒤에도 추가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19금 도서라서 회원 가입을 하고 성인 인증을 하지 않으면 상세 페이지로 진입할 수 없었고, 표지 이미지도 뜨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앞표지에 번역가의 이름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다만 아쉽고, 조금 맥이 빠졌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내가 번역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닐 수 없는 것도 슬펐다. 왠지 음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만화 출판사와 인연이 닿아 비로소 그나마 양지 근처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주로 종이책을 기반으로 한 라이트노벨을 번역했다. 내가 번역한 작품이 처음으로 물성을 띤 종이책으로 만들어져 나왔을 때 참 뿌듯했다. 역자 증정본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받아 봤다. 한동안 번역서가 출간되어 증정본을 받을 때면 특별한 선물인 양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결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분야의 책이 아니었고, 어떤 작품은 표지 그림이나 삽화에서 야릇한 분위기가 풍겼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마냥 자랑스러움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번역서가 너무 자주 출간되어 줄 만한 사람에게는 모두 한 권씩 주고 나자 비로소 들뜬 마음이 진정되었다. 조금은 심드렁해졌고, 원치 않는 라이트노벨을 선물받는 사람들의 괴로움도 헤아리게 되었다.


주변에 선물을 하다가 깨달았는데, 내가 번역하는 작품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음지와 양지 경계에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목표가 바뀌었다. 비로소 대중의 취향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는 일반적인 작품을 번역하고 싶었다. 그래서 역자 증정본을 받았을 때 좀 더 생색을 내며 선물하고 싶었다. 작가라면 자기만의 취향을 밀어붙이고 싶은 한편으로 널리 사랑받고 인정받는 작품을 쓰고 싶을 것이다. 번역가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개인적인 취향은 둘째 치고, 이왕이면 작품성이 높거나, 배울 점이 많거나, 대중에게 사랑받는 책을 번역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바람이었다.


일반 도서를 번역하는 일(책을 일반과 비일반으로 가른다는 게 살짝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 내 기준은 그랬다), 그것이야말로 내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다. 굳이 소설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소설을 번역하고 싶었다. 일본 소설 중에서는 아무래도 추리 소설이 가장 인기가 높다. 그래서 한동안 그런 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눈에 띄면 번역을 맡겨 달라고 무작정 이력서를 보냈었다. 너무 원했던 일이라서 민폐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출판사로부터 추리 소설의 출간 검토서를 써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추리 소설 번역을 꿈꿔 왔기 때문에 당연히 수락했고, 번역까지 맡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내게 의뢰한 출판사는 내가 이력서를 돌렸던 곳 중 하나였다.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그 후 쭉 잊고 지냈는데, 언제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이력서가 뒤늦게 내가 원하는 일감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맡은 작품은 추리 소설로서의 미덕을 두루 갖춘 수작이었다. 일본 현지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번역가로 일하는 동안, 일감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번역을 놓지 않고 있으면 가끔 이렇게 기대도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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