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라이트한 세계 너머로 2

한가함이 가져다 준 기회

by 정시체

추리 소설을 한 권 번역했다고 해서 그 후로도 계속 추리 소설을 번역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시 라이트노벨 번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고정 거래처가 사라졌으므로 다른 고정 거래처를 찾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끊임없이 일감을 따 와아야 하는 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회의감이 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결코 라이트노벨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하차하고 나니 돌아갈 수 없었다. 다른 여러 출판사의 레이블에 지원을 해 봤으나 대체로 답장이 없거나, 검토 후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뿐이었다. 나중에는 체면 불고하고 기존에 거래하던 출판사의 레이블에도 다시 연락을 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역시 프리랜서로 살아남으려면 일감이 들어왔을 때, 끌어안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거절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번역을 하고 싶은 내 의지나 의사를 비웃듯 상황은 정체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감이 없는 것을 당장 스스로 어떻게 해결할 순 없었으므로 그냥 놀았다. 라이트노벨을 번역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달 마감이 닥쳐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는데, 너무 할 일이 없다 보니 온갖 곳에 눈이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일본어와 관련된 곳에는 전부 다 기웃거렸다. 어디든 지원해서 기꺼이 샘플테스트에 응하고 흔쾌히 검토서를 썼다. 일본어 과외를 받을 학생을 찾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번역 기회가 찾아왔다. 통번역대학원 동문 밴드 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동문이 쓴 글로, 일본 도서를 번역할 번역가를 여럿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여러 번역가 중 한 명으로 뽑혔다. 일 년이 조금 못 되는 기간 동안 화학 열역학, 유전공학, 공룡학, 곤충 등 과학 분야의 기초 상식이 담긴 책을 여섯 권 번역했다.


내 역서 목록에서 ‘화학 열역학’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한 공학도가 어떻게 전공자도 아닌데 번역을 할 수 있었는지, 어렵진 않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비록 내 전문 분야는 아니었지만 번역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통번역대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주로 전문 지식을 기술적으로 번역하는 방법이다. 잘 모르는 분야의 글이라도 조사하고 공부하면 해당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로 맥락에 맞게 번역할 수 있다. 번역 도중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을 만큼 꽤 철저히 자료를 조사한다. 요즘엔 검색 기술도 잘 발달되어 있어서 차분히 찾아 나가면 결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화학 열역학’ 책을 번역하면서는 미분과 적분을 다시 배웠는데, 이것만큼은 조금 어려웠다. 아직도 그 책에 실린 수식을 완벽하게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흔히 번역을 하려면 전문 분야를 정하는 게 좋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문 지식에 빠삭한 것과, 출판을 할 수 있을 만큼 가독성 있는 글로 풀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자신이 정한 분야의 일감만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다. 유명 번역가가 되면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일감만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술을 전공했다. 하지만 미술 전문 번역가로 알려진 건 아니라서, 미술에 관한 일본어권 책을 펴내려는 모든 출판사에서 내게 일감을 맡기려고 대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 관련 번역 일이 들어올 때까지 다른 일은 거절하면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내 전문 분야와 관련 없는 일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온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몰랐던 지식을 익히는 사이에 나와 전혀 관련이 없던 일과도 관련이 생긴다. 몰랐던 사람을 사귀는 것과도 같다.


여섯 권이 모두 출간된 뒤에야 내가 일본어권 책으로 이루어진 교양서 전집 편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흔 권쯤 번역하는 데 열 명 정도의 번역가가 투입된 프로젝트였다. 동문을 통해 뜻밖에 라이트노벨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완전히 새로운 일로 메웠다. 대학원 졸업 후 늘 같은 자리를 지키며 버틴 보람이 있었다. 매 권마다 생소한 내용을 파악하느라 고생했지만, 덕분에 새로운 지식도 얻고 번역 스펙트럼도 넓혔다. 많은 사람에게 쓸모 있는 지식이 담긴 책을 번역했다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만화나 라이트노벨을 번역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뿌듯했다. 이제 주류에 대한 갈증은 완전히 해소됐다. 지금은 돈만 벌 수 있다면 비주류 19금 전자책이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계속 라이트노벨 번역에 쫓기고 있었다면 전집 번역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어서 아예 공고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한가한 것도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끼워넣어야 할 완충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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