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여 살린 5월의 홍삼
5월의 어느 날, 모르는 남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혹시 번역 가능한가요?’ 당시 엉겁결에 라이트노벨 번역에서 하차하고 새로운 일감을 간절하게 기다리던 때였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번역이든 다 씹어 먹을 기세로 ‘네, 가능합니다’라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빠른 답변은 프리랜서의 미덕 중 하나다.
남자는 홍삼 중개상이었다. 국내의 어느 홍삼 제조사에서 상품을 떼어다가 아마존 같은 해외 전자 상거래 사이트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일본 아마존으로 판로를 넓힐 계획이라, 한국어로 된 상품 소개글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참 희한했다. 나는 어디에도 ‘일본어 번역가다’, ‘번역을 맡겨달라’라는 글을 올린 적이 없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고 연락한 걸까? 물어 보니 한 포털사이트의 과외구하기 카페에서 내 글을 봤다고 했다.
그랬다. 일감이 없으니 과외 학생이라도 구해 보려고 한 카페에 과외 선생님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거의 아무런 문의가 오지 않은 채 게시글 목록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나조차 그 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가 카페 얘기를 꺼냈을 때도 ‘웬 카페?’라고만 생각하고 얼른 떠올리지 못했다. 기억을 되살린 후에도 번역 의뢰와 과외 구하기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다가 문득 그 게시글에 통번역대학원 졸업생임을 강조하며, ‘현재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라고 썼던 것이 떠올랐다. 구태여 내 학력과 경력을 내세우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이력이 너무 화려하다 보니 나도 뭐든 내세워야 할 것 같아 별수 없이 적은 문구였다. 뜻밖에도 남자는 ‘과외’가 아닌 ‘번역’이라는 단어에 꽂혀 번역을 의뢰했다. 번역가를 구하는데 왜 과외 구하기 카페를 찾았을까? 어쩌면 ‘번역이나 맡겨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 삼아 ‘일본어 번역가’로 검색을 해 봤는데 내 글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일감을 구하려고 온갖 군데를 쑤시고 다닐 때는 일감이 안 구해지더니, 지쳐서 그냥 포기하고 가만히 있으니 세상 생뚱맞은 경로로 일감이 저절로 굴러 들어왔다.
의뢰 내용도 참 특이했다. 동영상에 내레이션을 깔고 싶으니 번역 후 낭독까지 해 달라고 했다. 마침 시간이 남아돌아서 수락했다. 나는 낭독을 싫어하지 않았다. 원어민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듣기 거북하지 않게 낭독할 자신이 있었다. 번역을 마치고 악센트를 체크해서 낭독했다. 녹음은 스마트폰에 내장된 기본 녹음 앱으로 했다. 납품한 음성 파일이 동영상과 싱크가 맞지 않는다고 하기에 프리미어로 싱크까지 맞춰 주었다. 그땐 정말 되게 한가했었다. 그런데 남자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번역을 맡기면서 대뜸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 놓았다. 이를테면 자신의 사업 내용과 수완 같은 것들. 어떻게 물건을 떼어 와서 아마존에서 수익을 내는지, 거의 나를 사업에 끌어들일 기세로 열심히 전수했다. 아이템이 중요하다고 했다. 자기는 홍삼이지만, 내게는 일단 김부터 도전해 보라고 부추겼다. 미국 아마존에 올리면 무조건 팔린다고.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나도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듣다 보니 어느새 남자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맞장구를 쳐 주다가 엉겁결에 나는 원래 번역이 아니라 미술을 하던 사람이라는 말을 흘렸다. 남자는 이번에는 내 ‘미술’이라는 말에 꽂혔다. 그렇다면 아마존 상세 페이지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번역가를 붙잡고 내레이션을 시키더니, 이제 디자인을 맡기겠다니.
나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디자인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어도비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룰 줄 알아ᆞ갔지만 아주 간단한 편집만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해 주고도 욕먹을 것 같았기에, 여러 번 내 수준을 설명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보수 협상도 없이 멋대로 내 계좌에 돈을 입금해 버렸다. 일전에 번역비와 내레이션비를 입금한 그 계좌였다. 초짜 디자이너가 받기에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남자는 아주 잘된 디자인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메인 헤더와 소개글에 적당한 이미지를 넣고 글자를 배치하고 싶은데, 자기보다는 ‘전공자’인 내가 하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황당했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남아돌았고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기에 남자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해 줬다. 별다른 클레임은 없었고, 덕분에 한동안 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남자는 잊을 만하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젠가는 예전 번역 파일을 갖고 있느냐고 묻기에 찾아서 보내주었다. 또 언젠가는 새로 번역할 것이 생겼는데 예전에 돈을 줬으니 그냥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더 이상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것으로 남자와의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그의 홍삼 사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내레이션이 들어간 홍삼 광고 영상은 유튜브에 게재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사업 아이템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랄 뿐이다.
※ 30화까지만 쓸 수 있는 줄 모르고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쓰면서 너무 구질구질하고 우울해져서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이왕 시작했으니 이 주제로 당분간 더 써 보겠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다음 권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