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면서 일하실 분
나아지지 않는 조건, 계속 변하는 시장 속에서 번역가로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번역이라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것부터가 잘못이 아니었을까? 이제라도 탈출해야 할까? 회의감이 엄습했다.
십 년 남짓 번역을 하면서, 들어온 일을 되돌려 보낸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앞서 이야기했듯 초고수위 성인 만화를 번역했을 때다. 다른 한 번은 바로 이때, 라이트노벨을 번역하면서 회의감에 사로잡혔을 때다. 이 시기에는 번역을 하면서도 혹시 다른 일은 없는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번역을 하다가 무심코 구인 구직 사이트를 돌면서, 과연 내가 비슷한 직종이나 아예 다른 직종에 취업을 할 수 있을지 타진해 봤다. 괜찮은 직장이 있다면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취업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이것은 전형적인 ‘남의 떡이 커 보인다’ 현상이었다. 프리랜서로서의 현실이 막막한 데 비해 직장인의 현실은 더 나아 보였고, 그쪽 세계로 건너가면 나아질 것만 같았다. 애초에 그쪽 주민이 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는데도, 울타리 밖의 삶이 팍팍하니 일단 어느 울타리 안으로든 들어가서 월급을 받고 싶었다.
같은 출판계열인 편집 일에 도전하려 했다. 번역을 하면서 우리말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졌다고 믿었기에 얼마간 자신감이 있었다. 마침 일인 출판 기획자에게서 편집자로 같이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일주일에 한 번만 출근하고 나머지 요일에는 재택 근무를 하는 조건이었다. 완전한 직장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서 삶이 급격히 변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과 병행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서 수락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가급적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 두고 싶었다.
기획자는 내게 다른 일은 그만두고 편집 일에만 전념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하고 있는 번역 일에 대해 듣더니 안 하느니만 못 하다고 했다. 잔뜩 회의감에 젖어 있었을 때라 왠지 아주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가 그 일에서 나를 건져 내어 이끌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들어와 있던 일감을 반납했다. 다섯 권짜리 라이트노벨의 외전이었다. 앞서 다섯 권을 모두 내가 번역한 터라 출판사에서는 부디 이것까지만 번역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으나, 당시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곳과는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길었던 라이트노벨과의 인연도 끊겨 버렸다.
외도는 실패했다. 나는 편집자가 되지 못했다. 일은 싫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조건이 맞지 않았다. 주 1회 출근이고 다른 날은 재택 근무라서 보수가 적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삶과 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시간과 요일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기획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최저 임금이 만 원에 육박하던 때였다. ‘이럴 바에는 그냥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번역할 때 하던 생각을 편집할 때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기획자는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상사로서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이만한 보수를 받고 이만한 강도로 일하는 건 불합리하다’라며 불만을 토로했을 때, 그는 말했다. 오히려 자신이 '돈을 주면서 가르치는 입장'이라고. 나 같은 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로도 써 주지 않을 것이며, 어디서 글을 쓰고 다듬더라도 자신만큼 챙겨주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은 돈에도 만족한 채,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 속에서 열정 하나만 갖고 노력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이미 수년 간 번역을 하면서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도망쳐 들어간 곳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기에, 나도 대놓고 그건 싫다고 하며 나왔다.
편집자가 되려고 외도했다가 번역 일감을 돌려보낸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어차피 프리랜서로 계약했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면 둘 다 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기획자가 내 미래를 책임 져 주진 않으니 그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 판단했어야 했다. 라이트노벨 번역이 다른 사람에겐 별 볼 일 없는 일로 보일지 모른다. 나는 유명하거나 잘나가는 번역가도 아니다. 하지만 번역은 내게 전부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너무도 쉽게 번역을 포기하려 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라이트노벨 번역을 때려치우고 편집자가 되는 것도 실패한 뒤, 한동안 손가락만 빨았다. 불안해서 행동했을 뿐인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을까?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돌파구는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라이트노벨의 세계 밖으로 밀려난 후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