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노벨인데 왜 어렵지?
만화 번역에서 하차한 것은 타이밍이 나빴기 때문이다. 잔뜩 지쳐 있을 때 선정적인 만화를 무더기로 받으니 심신에 타격이 컸다. 성인물 자체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고, 19금 콘텐츠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가려 받는 편도 아니다. 번역 후에 돈만 받으면 그만이다. 나는 지금도 종종 19금 콘텐츠를 번역한다.
사실 내게는 다른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 시기에 또 다른 업체에서 꾸준히 번역 일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만화 번역과 병행하고 있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절대 만화 번역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 구한 일감은 한 중소 콘텐츠 유통 기업의 소설 번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트 노벨로, 일본 서브 컬처의 한 장르였다. 중간중간 삽화가 들어가지만 대부분 글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은 일반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번역 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내가 꿈꿔 온 출판 번역에 거의 가까운 일이었다. 이미지가 빠져 나간 세계는 고요해서 온전히 텍스트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온통 글뿐이므로 문장을 매만지는 재미도 훨씬 컸다. 문장의 흐름을 고민하며 번역문을 써 내려가다 보면 비로소 어엿한 번역가가 된 것 같았다.
마냥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뜻대로 문장이 써지지 않아 괴롭기도 했다. 번역도 결국에는 글을 쓰는 일이라서 글을 새로 쓰는 것과 비슷한 수고가 들어갔다. 원문이 무슨 뜻인지는 읽으면 대충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는 통번역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가능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술술 풀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써 본 적도 없었다. 일반 독자일 때는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당장 한국어 실력과 문장력을 높이는 것이 절실해졌다.
필사를 시작했다. 어느 번역가 카페에 필사 소모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단편 소설 한 편 분량의 글(원고지 80매)을 필사하고 인증하는 모임이었다. 정해진 분량만 채우면 어떤 글을 어떻게 필사하든 상관없었다. 나는 단편 소설을 한 달 동안, 또는 장편 소설을 몇 달에 걸쳐 타이핑했다. 수필이나 인문서, 번역서를 타이핑하기도 했다. 그렇게 약 3년을 필사했다.
필사는 손글씨로 해야 글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어서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바빠서 일일이 손으로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효과를 톡톡히 봤다. 번역과 씨름하면서 창작의 고통과 거의 흡사한 고통에 시달리던 때였다. 막연히 좋은 문장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주어진 원문을 비문 없이 무난한 번역문로 옮기고 싶었다. 조사와 부사의 처리,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같은 사소하면서도 구체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했다. 소설이라 시제와 인칭에서 막힐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번역문이 어색한데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막막하기도 했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모르니 물어봐서 고칠 수도 없었다.
필사를 하다보면 나를 괴롭히던 문제의 답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고민했던 부분이 실력 있는 작가의 글에서는 말끔히 해결되어 있었다. 매번 다른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필사를 하는 사이에 점점 고민이 줄어들었다. 마땅한 글쓰기 선생님이 없는 상황에서 당장 마감에 맞춰 문장을 만들어야 할 때 주변의 여러 글이 내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사실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는 말 그대로 라이트해서 번역을 하는 데 엄청난 문장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특히 당시 내게 배정된 작품들은 전부 대사 위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쓰는 데 안간힘을 썼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스스로가 가소롭다. 욕심도 있었다. 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라 정말 잘 하고 싶었고, 더 나아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참 서툴렀다. 이런 식으로 초기에 번역한 라이트노벨들은 거의 열 권에 달하는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서비스되고 있다. 인기작은 아니다. 전자책으로만 발간된 데다 마이너한 장르라서 찾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 그 작품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었지만 내 흑역사나 마찬가지다. 절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후 만화 출판사의 라이트노벨 레이블로 건너가 약 6년 가까이 라이트노벨을 번역했다. 기를 쓰고 연마한 한국어 실력은 일본어 실력과 함께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번역 생활을 든든히 받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