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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재 Aug 10. 2022

7월의 녹우당

-토문재 엽서 · 2

폭우 뚫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 ‘초록비가 내리는 집’ 갑니다. 젖은 땅에 옷은 자꾸 질척거립니다. 참깨 꽃을 지나치고 고구마 순들을 건너 빗물에 흩어지는 길이 흘러갑니다. 낮은 웅덩이 낯설지 않아 첨벙거려 봅니다. 습관처럼 지나치지 못하고 첨벙거리며 정치인이자, 틀에 박힌 한문학에서 벗어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자연에서 살려 낸 시조문학의 최고봉 윤선도. 고산의「오우가」와「어부사시사」시어들이 물웅덩 위로 둥둥둥 떠다니는 듯합니다.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로다

동산에 달 오르니 그것 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이면 그만이지 또 더하여 무엇 하리

                                                 「오우가」 일부     


나는 마음 퍼질러 놓을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될까? 묻고 답이 없는 혼자 말들은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뿐입니다.      


고산은 서인 송시열에게 정치적 패해와 당파싸움에 휩쓸려 17년을 유배지에서, 19년은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았습니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고집과 칼날 같은 성품을 지녔지만 백성을 아끼는 따뜻한 사람이었답니다.    

  


안개구름 덕음산 중턱에 걸터앉아 더 빠른 비를 재촉하는 데 녹우당, 안채, 행랑채,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굳게 입 다물고 있어 볼 수가 없습니다. 담장을 타고 내리는 댓잎 파리만 사운 거리며 오묘한 말씀으로 빗방울과 어우러져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비자림 가는 숲길은 눅눅하고 습한 공기에 버무려진 빗줄기가 버거워서 돌아섭니다.   

   

서성이고 서성여도 빗장 열리지 않을 녹우당 앞 은행나무만 바라보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미쳐야만 할 수 있는 비 맞은 생쥐 같은 내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장대비로 유적지는 눈동자 하나 없습니다. 백련지의 연꽃은 초록과 어우러진 정자와 다리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연상하게 합니다. 빗방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몸과 마음이 어부사시사 시비와 함께 젖어가는 지금이 즐겁습니다.      


연동의 옛 이름이 백련동이라고 합니다.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백련동에 터를 잡고 500여 년 이상 살아온 윤 씨 가문의 역사와 유물은 전시관이 보수 중으로 관람할 수 없습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찻집에서 따뜻한 모과차 한 잔 목을 축입니다. 카페 사장님은 우산도 없이 비에 젖은 나그네 홀로 떠도는 게 낭만인지 청승인지 모르겠고 그래도 멋있다는 칭찬 포크 하나 꼿아 뒤뜰에서 수확하였다는 모시 잎으로 만든 개떡 살짝 내밀고 있습니다. 엄마의 맛. 엄마 살아생전 감사한 줄도 모르고 먹었던 소중한 모시 잎 개떡 추억을 맛보았습니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뒤적이듯 윤선도 유적지를 뒤적거리다 해남 버스터미널 나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립니다. 뜨거운 바람과 폐허의 내 심장에 쏟아 붙는 빗줄기 더욱 거세어지는 오후와 오늘이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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