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에 11월을 담다

백련재·2

by 김민재

카페 ‘비원’

‘늙어 간다는 건 계속 새로운 문턱을 넘는 일이다’ 신현림 시인은 말한다. 나의 늙음도 새로운 나를 넘는 일일까. 무엇으로든 나이와 상관없이 도전하는 것임에 입주 작가로 백련재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일 수도 있겠다. 나를 잃고 슬프게 늙어가지 않기 위해 오늘도 바람의 줄기 따라 걷는다. 외출이다. 순례문학관 양근령 해설사는 “선생님, 그렇게 돌아만 다니면 글은 언제 쓰나요.” “날마다 글은 발로 쓰고 있지요.”


순례문학관 지나 윤선도 박물관 건너 연동마을 개 짖어대는 귀퉁이 돌아 농로길 걷는다. 태양 빛은 강렬하게 얼굴을 강타하고 가을 추수 끝난 고적한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달콤하다. 이 길 또한 백련재에 입주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나의 앞모습과 수없이 많은 바람과 태양이 내 뒷모습을 어루만지고 갈 시간일지 모른다. 그 감성을 11월에 걸쳐놓고 바라보는 들녘은 누군가 놓고 간 슬픔 같다. 슬픔이 깊어지면 논두렁에 박힌 사연도 깊어질 터 내 그림자 지우며 바삐 걷는다. 메기 베드로시안의 시 「그런 길은 없다」의 ‘나의 어두운 시기가/비슷한 여행을 하는/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움을 줄 수 있기를’ 마지막 연을 읊조리면서 내가 던진 무수한 단어들이 바람에 살을 붙여 연동저수지에 침몰하는 오전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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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계동마을 지나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의 ‘비원’을 생각하다 도착한 해남군 삼산면 가재길 171. 카페 ‘비원’은 전남 민간 정원 28호로 지정된 장소로 입장료는 5,000원이다. 커피 3,000원에 주전부리 하나 사들고 ‘바람의 정원’ 오른다. 바람의 정원은 구룡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가 시원스럽고 탁 트인 해남의 들녘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수국 꽃 지고 동백꽃 없는 수국(동백) 정원의 푸름 따라 서성이다 장미꽃 한 송이눈으로 꺾어 들고 온 시집에 새긴다. 그러나 고상한 척 개폼 잡고 앉았지만 시집의 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써야겠다는 볼펜심 구르다가 바삭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뒤돌아보면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 오지 않는 당신이란 문장으로 인해 멍 때리다 모과나무에 마음 걸어두고 오후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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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마실’

북카페에서 이 책 저책 기웃거리다 책의 가장 얄은 페이지를 에코 백에 넣고 카페 ‘마실’로 마실 간다.

‘마실’은 ‘근처에 사는 이웃에 놀러 가는 일’ 국어사전은 설명한다.


수백의 실핏줄들이 동그라미를 그려내고 낮과 밤 구분할 수 없는 시간들로 이어지듯 온몸 붉게 도형을 만들었던, 몸 꽃핀 두드러기의 도착지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던 사계절을 지나기까지 바깥의 기분을 알지 못했던, 건강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실 간다.


20251115_140757.jpg 카페'마실' 정원에서 바라본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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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재를 중심으로 연동저수지에서 카페 ‘비원’은 왼쪽 길. 카페 ‘마실’은 오른쪽 길로 갈라진다. 11월의 따뜻한 공기가 12월의 찬 공기로 바뀔 때까지 넘나들었던 곳. 늘 혼자 다니지만 가끔은 상주 작가인 박인하 시인과 입주 작가인 이언주 소설가와 함께 하는 날도 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얼음땡이 풀리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꼼짝하지 않고 늦가을 숨소리를 듣곤 한다.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하고 지나치는 두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이렇게 수면 위로 부서지는 빛으로 반사되어 내게로 전달되던 시간. 바람에게 체온까지 나눠 주면서 등짝이 뜨겁도록 앉아있다 오던 곳.


오늘은 혼자 나선다. 양근령 해설사가 본다면 ‘선생님 글 안 쓰고 또 어디 가세요.’ 할 것 같아 문학관 뒤쪽으로 살금살금 나서지만 그 마음 안다. 친근함의 표현임을. 저수지 둑길 따라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 글 쓰는 것보다 내속에 아름다운 꽃씨 하나 심고 싶었다고 말해주고 올걸 그랬나.


연동저수지를 풍경으로 마시며 유리잔에서 노닐고 있는 오리가족과 책갈피로 칸칸이 끼어든 나뭇잎에게 전하는 나의 연서는 늘 육각형이다. 뾰족하여 스며들지 못하는 연서를 쓰고 바스락거려 붙일 수 없는 우체통을 찾아 카페 ‘마실’을 나오는데 귓전에 울리는 엄마와 딸의 대화.

“엄마, 뒷모습 찍어 줄게”

“무엇을 생각하고 뒷모습을 찍으라는 거니, 초라하게”

‘초라하다’란 단어가 나를 찌른다. 나이 많으면 꾀죄죄하고 궁상스러워지는 걸까. 내 나이를 뒤돌아보게 하며 오늘 나도 청승한 편 찍었나.


20251217_134907.jpg 카페 '마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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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7_124235.jpg 연동저수지 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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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연동’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 4시 어슬렁거리며 동네 한 바퀴 돌다 카페 '연동'으로 스며든 흐린 날씨는 서로가 서로의 말들을 만들고 주변의 소란을 키우며 졸음을 거둔다. 창으로 흘러내리는 흐린 줄기가 사선으로 가고 있다. 나는 창안에서 희멀건 날씨를 고르고 희뿌연 생각을 담아 탁자에 놓는다.


카페 ‘연동’은 연동마을 안에 있어 백련재에서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오늘처럼 흐린 날에는 가까운 카페 ‘연동’에서 노닐다 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날 이곳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게 나의 일이다.


셋이서 함께하던 카페에 혼자 왔다. 이번 소설집『모두의 안부』출간을 한 이언주 작가는 집에 잠깐 다니러 갔고, 시집『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의 박인하 시인은 청탁받은 칼럼 마감에 머릿속 지진이란다. 칼럼을 신문에 발표하고, 소설을 책으로 출간하고, 시는 안 쓰고 싸돌아다니는 나는 커피 잔에 빠져 어둠을 담고. 카페 ‘연동’의 밤이 깊다.


20251219_143906.jpg 카페 '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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