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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재 Sep 14. 2019

5. 길 잃었다, 그 섬에서

- 반(Van), 악타마르 섬

  마치 내 안의 우울 씨가 만들어 논 것처럼 들어오는 물길은 있어도 나가는 물길이 없는 반 호수. 바닥의 염도에 따라 시간마다 다양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는 소금호수는 해발 1700m의 고원지에 있다. 호수 바닥에서는 물이 계속 솟아오르고 나가는 길은 태양열에 증발하여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지만 식수 농업용 수로로 사용할 수 없다. 단 인지케 팔리(청어처럼 생김)라는 이 물고기만 산다는 여기, 소금 꽃 피워 올리는 호수 따라 반(Van) 성채 오른다.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였던 반 칼레시 입구 키 큰 미루나무 하늘 닿으려는 열망 그림자에 둘둘 말아 올리며 바위산에 쌓아 올린 토성 한발 한발 내딛는다.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오스만 투르를 거치면서 뺏고 빼앗기고 세월의 흔적 덧칠하면서 견딘 흙벽돌은 단단해 지기 위해 흙에 타조 알을 섞기도 하였다는데 견딘 무게만큼 성채의 상처도 크다.


 돌문을 지나 성에 오르니 뒤로는 반 시내와 반 호수 하늘과 맞닿아 있고 앞으로는 낭떠러지 아래 드넓은 평원과 폐허의 잔해 너부러져 있다. 성채 끝에 매달린 터키 국기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 꾹 묻어두고 펄럭인다.

 

반 칼레시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 간 두 번의 전쟁. 오스만이 패하면서 러시아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와 내통하여 전쟁에 패했다는 오해와 오스만이 아르메니아인에게 세금을 무겁게 매겨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아르메니아인을 집단 수용소에 강제 이주시켰고, 수용되는 과정에서 범죄와 기아 질병에 죽어갔다. 터키 정부는 강제 이주에 따른 희생이라 하고 아르메니아는 집단 학살이라 한다.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지만 2차 대전 후 결국 러시아의 배반으로 아르메니아는 반 지역을 터키에 빼앗기면서 대국에 의한 소수민족의 슬픈 역사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돌덩이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마음 누르며 반 박물관 앞. 보수 중이라서 관람할 수 없고 대형 박물관 유리벽의 웅장함과 유리벽에 반영된 반 성채가 막 달려들 것 같은, 유리벽 속으로 빨려갈 것 같은, 이 풍경과 사물들이 내 눈을 덮치고 있다.

     

반 박물관 유리벽

  10세기 아르메니아 바스 푸라칸 왕국의 초대 왕 기긱 1세 때 건축가 마누엘 수도사에 의해 세워졌다는 소금호수에 떠 있는 거룩한 십자가 교회 악타마르 섬 찰방찰방 뱃머리 돌린다. 아탈란에 정박 중인 유람선들 아직 도착하지 않는 오후를 기다리고 우리는 섬까지 유람선으로 약 15분. 맑은 물 넓은 호수. 그 이면에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숨 쉬고 있다. 궁전은 흔적 없고 덩그러니 섬을 지키고 있는 성 십자가 교회 수도사들 간데없고 타르마 공주의 전설만 출렁인다.


 교회 외부 붉은 진흙 벽에 새겨진 양각 부조의 섬세함. 구약성서의 사건들이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는 부조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성전에 들어갈 때 겸손히 몸을 낮추라는 뜻인지 유난히 낮은 출입문 들어서고 또 들어서니 채색 벽화 신약성서는 지워지고 벗겨지고, 성전 한가운데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프레스코화가 고운 자태로 눈 맞춘다.      


  아르메니아의 슬픈 역사의 땅 반. 그리고 악타마르 섬 굴곡의 역사를 뒤로 하고 호수에 몸 담그고 해수욕 즐기는 사람들의 짜디짠 이야기를 엮으며 교회 한 바퀴 휭 돌아 유람선 탄다.  누고 온 것도 아닌데 길 잃은 규영, 경희 선생님은 섬에 남겨졌다. 낯선 선착장에서 호수 깊이만 하염없이 재고 있었을 막막함. 푸른 천이라면 가위로 호수를 싹둑 잘라서 이쪽과 저쪽을 붉은 실 꿰어  깁고 싶었을 아득함. 두르고 있던 비췻빛 스카프로 날개 접어 새처럼 훨훨 날고 싶었을 답답함. 두 발로 건널 수 없는 꽝! 총포 쏘아 위치를 알리고 싶었을 허공의 시간. 호수가 멍석이나 덕석이라면 돌돌 말아버리고 싶었을. 점심으로 나온 생선가시 목에 걸려 넘겨지지 않을, 뒤늦게 합류한 두 선생님의 마음이 반 호수 물맛보다 더 짭조름하였으리라. 길 잃었던 그 섬.  

   

악타마르 섬  성십자가 성당


 돌무더기 엉키고 헝클어진 언덕 오른다. 우라르투의 왕실 요새 차부쉬 테페. 스키타이 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는 동쪽 할디 신은 우라르투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한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온몸으로 꼬옥 안고 언덕 오른 2000년 전의 고대 유적지는 돌무더기로 뒹굴며 잡풀 속에 잠들어있고, 2000년 후의 나는 망망한 귀르 프나르 평야를 멍하니 바라본다. 주인 잃은 채 외롭게 있는 무너진 요새 저 건너 서쪽 사르두리 2세가 건설한 이르무쉬니 신전 우라르투의 설형문자(쐐기문자) 그늘을 만들고 더위에 쉬어가라 한다. 땅속에 묻혀 숨을 쉬지 못하는 창고 터 항아리 잡풀 삐죽삐죽 부스럭 거리는 흙더미 사이로 항아리 조각 고개 내밀고 있다. 하수구. 세면대. 절구통 나뒹구는 사이로 현지 꼬맹이들 졸졸졸 따라다닌다. 인숙 선생님이 선물한 스티커 팔랑거리며 사진 찍는다.

잡풀 무성한 신전
차부쉬 테페


 


 귀젤수 마을 옆의 언덕에 있는 호샵 칼레시. 1643년 마흐무디 통치자인 사르 슐레이만에 의해 세워졌다는 성문 굳게 닫혀다 열린다. 소낙비 후드득 발목 적시는 바위 굴 지나 미끄러운 길 오른다. 무너지고 부서진 요새 이슬람 사원이었을 창고, 목욕탕, 원형 격투기장 길 따라 마을에서 온 아이들 들썩들썩 발길에 걸린다. 뒹구는 돌조각 벽돌조각 무너진 흙더미의 유적지 그 찬란했던 문명은 다 어디로 가고 쓸쓸히 버려진 채 세월을 이고 있을까. 돌아가는 길 귀젤리 마을 찻집에서의 낭만을 접는다. 이란과 인접지역이며 쿠르드족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 또 철수 권고지역이라는데 혹시 모를 안전을 위해서라는 경찰과 군인의 조언을 따를 수밖에

      

호샵 칼레시

  

쿠르드족 마을


 타트 반에서 또 검문이다. 아나톨리아 동부는 아르메니아, 이란, 시리아 국경과 인접도시라 수시로 검문이다. 시내를 지나가는데 삼성 간판이 보인다. 터키 동부 후미진 이 작은 도시에서 우리나라 삼성 로고를 보니 무척 반갑다. 2300m 터널 고개를 넘어 인류 최초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는 티그리스 강 상류 800년이 넘는 ‘말라마디’ 교각의 아름다움에 빠져본다. 지금이야 이보다 더 멋있는 교각 많지만 1147년대 작품이자 문명의 시작 티그리스 강 상류를 감안해 보면 어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의 기사님 휴식도 차이도 사양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말라마디 교각

 하이타이가 멸망한 뒤 아시리아 우라르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거쳐 BC115년에 로마의 식민지로, 다시 AD639년 페르시아 비잔틴제국 오스만 튀르크 지배를 받아온 쿠르드인의 중심도시 디야르바크르. 티그리스 강변에 세워진 도시 현무암 성벽 따라 걷는다. 평균 높이가 10미터 이상에 최고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육중한 성벽 색깔은 거무스름하며 성벽의 보존상태가 매우 엉망이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구멍 난 부분에는 용변과 쓰레기들이 가득했고 현무암 거무스름한 성벽에 무엇을 태웠는지 더 검게 그을린 모습들이 안타깝다.  

     

디야르바르크르 고대 성벽

 터키 공화국 수립 후 "터키의 주인은 둘이 있다. 하나는 터키족이고 다른 하나는 쿠르드족이다"라며 초대 국회 창립 연설에서 아타튀르크는 두 민족 공동체를 인정했다. 그러나 2년 후 통과된 법안에는 "터키에는 단 하나의 민족만이 존재한다."라고 명시해 쿠르드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렸다고 한다.(터키 프렌즈 참고)     


 처음부터 터키공화국은 터키와 쿠르드 간의 공동 국가로 인정했다면 쿠르드 독립을 주장하는 강경 무장 테러단체인 PKK(쿠르드 노동자당) 반란은 없지 않았을까. 일방적인 언어와 문화가 말살되니 자치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것은 힘없는 소수민족으로서 정당방위 아닐까. 생각하다 휴게소에서 만난 할머니와 두 아기의 맑은 눈동자가 자꾸 버스를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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