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편지·2

- 그 일주일

by 김민재

둘째 날

당신에 대한 감정들이 설익은 콩처럼 설겅거리며 씹히지 않는 날이면 늘 푸른 바다를 그리워했고 전하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구르고 목에 넘겨지지 않을 때에는 낱말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싶었던 시간들이 이렇게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제의 청명한 그 하늘은 지워지고 먹구름 가득 듬성듬성 빗방울 우비에 사선을 긋는 올레길 당신을 생각하며 걷습니다. 7월 장마 쏟아지는 거친 폭우와 맞서며 걸었던 그 길을 3개월 만에 다시 걷습니다. 당신에 대한 미련처럼 또한 추자도에 미련이 많았나 봅니다.


아이들의 마음처럼 알록달록한 색을 입은 토요일의 추자초등학교 운동장 잔디 위로 아이들 깔깔거립니다. 그 뒤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한 최영 장군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 여름날의 그때처럼 오늘도 비에 젖어가고 있습니다. 최영 장군은 추자도민에게 그물 짜는 방법, 그물로 후리질하는 방법, 주낙질 하는 방법 등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주었기에 고마움과 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 번 다녀간 곳이라고 으슥한 기운은 돌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지나갑니다.

다무래미

이 거센 바람과 절벽을 때리는 파도소리 들으며 철벅철벅 빗길을 걷다 길의 끝에서 두 갈래 길. 먼저 만나는 추자 판 ‘모세의 기적’ 다무래미. 밀물 때는 상추자도와 따로 떨어진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연결되는 신기한 섬. 내가 본 다무래미는 밀물 때라 자갈길은 보이지 않고 세찬 바람만 불어댑니다.

다무래미 길 나와 인적 없는 산길 사이로 묘지들의 향연입니다. 음침한 날씨 타고 솟아난 봉분들에 쫓기는 듯 내 눈빛은 출렁이고 발걸음은 심장을 두드립니다. 특히 흐린 날의 혼자는 늘 이렇게 허둥대고 움츠리고 무엇이 두려움을 만들어낼까요. 그러면서 또 겁 없이 나서기를 반복하지만요.


후포 작지 해안까지 왔습니다. 추자도는 자갈해안이 많아 자갈을 ‘작지’라고 부른답니다. 추자에는 하천이 없기 때문에 해변의 자갈은 해안 절벽으로 떨어져 나온 암석이 파도에 부서지고 깎이고 닳아 후포해안도 자갈밭입니다. 정자에 앉아 뭉개지고 깨지고 부서져 동글동글해질 때까지의 세월을 부대꼈을 몽돌을 바라보다 자갈밭길 걸어온 시리고 아린 내 삶 같아 울컥했습니다.


후포만을 끼고 에돌아 갯바위에 바람과 맞서 낚시하는 분들 아슬아슬 곡예사 같습니다. 왼쪽 계단을 오르면 용 웅덩이가 보이는 정자가 있고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나바론 하늘길이지만 거센 바람에 내가 날아갈 것 같아 대서리 마을길 휘돌아 봅니다. 귀엽게 혹은 새롭게 두 개의 성당 건물이 대조를 이루며 다정하게 마주 보고 있고, 가운데 샘과 일본 샘을 마을은 안아주고 있습니다.

영흥리 벽화골목 너머 하추자도로 발길을 돌립니다.


상추자에서 하추자를 잇는 추자 대교 난간 길 날아갈 듯 비바람 몰아칩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 세찬바람. 그 여름날처럼 혼자라서 무서움과 두려움에 왈칵, 등줄기를 타고 내리지만 해안선 길은 더없이 호젓하기도 하지만 으슥하기도 합니다.

상. 하 추자를 잇는 다리는 1972년에 완공되어 주민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인도로 섬과 섬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도로 된 다리에 차량이 다니다 보니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가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이 대교는 1995년에 준공되어 사람도 차도 넘나들 수 있는 212.35m의 긴 다리입니다.

당신과 내 운명처럼 또 갈림길이 나오네요. 오른쪽은 버스노선의 묵리 고갯길, 왼쪽은 예초리로 가는 해안도로 길입니다. 그래요 우린 늘 같은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갈라지고 너와 나로 분리된 몸처럼 언제나 따로따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묵리 방향으로 걷는데 여인인 듯 부부인 듯 다정하게 나를 앞질러 지나갑니다. 올레 숲길을 향하는 그들을 따라갈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혼자서는 비에 젖은 숲길 이 음습한 날씨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래도 올레 길은 궁금하고 두 마음에 혼란이 옵니다. 쪼그리고 앉아 망설이다 조금 떨어져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로 합니다. 그들이 멈추면 나도 멀찌감치 멈추고 그들이 걸으면 따라 걷고 허락도 없이 따라가는 내가 재미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 함께 걷는다는 안도감에 걷는 길이 즐겁습니다.

가을입니다. 단풍이 없는 섬 들녘엔 억새꽃 휘날릴 때마다 숨 고르기 하며 수평선을 붙잡고 있다가 앞서간 발자국을 찾을 수 없어 미끄러운 숲길 달립니다. 그러다 보면 저만치서 나를 기다려 주는 듯, 그러다 다시 발길을 옮기는 그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당신은 알 수 없겠지요.


묵리 마을길로 왔습니다. 고마움의 인사를 건네며 동행해도 되는지 용기를 내어 물어 봅니다. 이천에서 왔다는 부부는 20일간 제주 올레길 트레킹 중 오늘 추자도 18-1코스라고 합니다.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올레길 우거진 숲길을 걸을 수 있는 행운의 날입니다.

서로 손잡아주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 뒤를 따라 걷는 나는 부러웠던 마음 바지 주머니 속에 밀어둡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이토록 예쁘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요. 알고 있지만 선 듯 나서지 않을 뿐이겠지요. 나에게 보낸 당신 말이 어딘가에 고여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 당신에게 보낸 내 말들이 어딘가로 흘러간 것처럼.


신양항 스쳐 모진이 몽돌해안입니다. 바람 한번 모질게 불어댑니다. 모진이 해변의 바람은 이름을 닮아가는 걸까요. 지난 여름날처럼 오늘의 바람 또한 거세게 불어댑니다. 파도에 굴리면 자갈 구르는 소리가 자갈자갈 음악처럼 들린다는데도 모질게 불어대는 바람소리뿐입니다.

모진이 몽돌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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