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 해변에서 그 아이
사진을 자주 많이 찍는 나와는 달리 옆지기는 자주 찍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정기적으로 사진을 백업해두는 나의 핸드폰에는 최근 이삼 년간의 사진만이 남아있는 반면에 그의 핸드폰에는 최근 10년 가량의 사진들이 남아있다.
유모차에서 발을 까딱거리며 간식을 먹던 아이, 작고 따뜻했던 테라로사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아이, 전나무숲에서 발그레한 볼이 빛나던 아이, 해변에서 게를 잡아 신났던 아이,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올챙이와 햇살을 잡던 아이, 좋아하는 초밥을 앞에 두고 호탕하게 웃던 아이까지. 아주 꼬마였던 시절부터 십대에 들어선 아이까지 한 두 컷씩 다 들어있다. 그런 면에서 사진을 많이 찍지 않는 것이 때로는 추억을 남기기에 가장 좋은 방법 같다.
주말마다 봄비가 내리다가 오랜만에 날이 개였고, 따뜻하기까지 했던 그런 날이었다. 이제는 교복을 입고 다니며 내 키보다도 커진 첫째와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걸었다. 봄꽃이 얼마나 피었고 봄꽃이 얼마나 졌는지 봄날의 숙제를 함께 하며 길을 걸었다. 오전에 비를 맞았던 나무들의 색은 더 짙어져 있었고 자두나무를 지나갈 때는 상큼한 자두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자두나무를 지나 벚나무 아래를 지나가다 보니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들이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꼬마들은 뛰어다니며 투명한 비눗방울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했다. 파란 하늘이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며 꼬마들의 웃음을 먼 곳으로 퍼 나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중학생도 저렇게 나비처럼 팔랑이며 뛰어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니 꼬마였던 첫째 아이가 너무나 보고 싶어 졌다. 물론 여전히 첫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다는 건 매 순간 그리움을 만드는 것만 같다. 어제의 아이는, 일 년 전의 아이는, 삼 년 전의 아이는, 오 년 전의 꼬마는, 막 첫걸음을 떼던 아기는 그리움 안에서만 산다. 물론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어느 날은 갑자기 그리움이 훅하고 밀려온다. 꼬마였던 나의 아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옆지기의 사진첩을 함께 보곤 한다. 그의 사진 앱에는 우리 아이들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까닭에.
걷기를 잠시 멈추고 옆지기의 사진 앱에서 그리운 시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맞아. 그랬지. 호기심이 넘쳐나던 꼬마는 새로운 것을 사랑했지. 에너지가 넘쳐나던 꼬마 아이는 “우리는 여행쟁이야”라고 하며 새로운 계절과 세계에 적극적이었지. 그렇게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월정 해변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첫째 아이의 사진을 발견했다. 겨울도 봄도 지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유월의 제주였다. 지금은 카페도 많고 식당도 많지만 그때의 월정 해변은 그저 검은 돌들과 모래와 해안도로뿐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바다의 푸른 물빛만이 공간을 채우던 시절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 돌 틈 사이로 다니던 게를 잡고 신이 났던 아이는 부드러운 유월의 눈부신 바람을 타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던 아이의 뒤를 쫓으며 옆지기는 사진을 찍었던 것이고. 그 사진을 보니 막 걷기 시작했던 둘째의 손을 잡고서 그들을 바라보던 나도 보이기 시작했다. 맞아. 그랬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기억들을 자주 꺼내 들여다보면 언제든지 기억을 소환해낼 수 있다. 그리운 추억이 담긴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면 눈을 감아도 그때의 사람과 시간과 바람과 향기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오늘 월정 해변의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추억이 담긴 사진 덕분이다. 그 사진을 내 핸드폰에도 옮겨 담아두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그대로 인듯한데 아이는 늘 새로운 아이다. 오늘도 언젠가는 몹시 그리워질 것이다. ‘그때 비가 갠 날이었지. 중학생 아이의 손을 꼭 잡고서 봄꽃이 피고 봄꽃이 지는 것을 함께 보았어. 아이의 손이 참 따뜻했었지’하고 말이다. 그래서 떨어지는 벚꽃잎을 손으로 잡았다고 기뻐하는 아이의 미소를 찰칵 사진으로 담아두었다. 오늘 이 순간이 몹시 그리워질 언젠가 그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