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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Oct 05. 2021

덕적도 백패킹

그 섬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그러고 보면 나에겐 근교 섬 여행의 심리적 방어선 같은 것이 있었다. 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배편이 연기되는 등의 일종의 고립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것이었다. 한편으론 사면이 바닷물로 둘러싸인 작은 육지가 주는 고립을 동경해왔다. 이런 양가적 감정 때문인지 나는 오랫동안 섬으로 백패킹 가는 상상만을 해왔다. 배낭 안에 넣어야 할 소소한 짐들을 그려보고,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거리를 생각해보고, 그 배낭의 무게와 그날의 설영지를 생각해보고 나면 상상은 끝이 난다. 그러고는 조만간 섬으로 들어가는 배편을 예약해봐야겠다 다짐을 한다. 그러다가 보면 몇 주가, 몇 달이 훅 지나가곤 했다.


 청명하던 어느 가을의 휴일. 강원도의 한 휴양림을 가기 위해 백패킹 모드로 길을 나선 차였다. 그때 갑자기 휴양림을 예약한 후 결재를 하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아차 싶어 다시 예약 사이트로 들어가 보니 휴양림 데크는 이미 취소가 된 후였다. 혹시 빈자리가 나있는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빈 데크 하나 없이 모두 만실이었다.

그럼 오늘 어디로 가야 하지?

 고민하던 우리는 그 길로 인천항 여객터미널로 갔다. 가서 보니 마침 인천항에서 덕적도로 들어가는 배가 있어 바로 승선할 수 있었다. 심리적 방어선을 허물고 오랫동안 상상만 하던 근교 섬으로 가게 된 것은 이런 해프닝 덕이었다.




 쾌속선을 타고 인천항에서 한 시간쯤 가니 푸른 섬이 보이기 시작했고, 선착장에 도착하니 다양한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배낭이 하루 자연에 기댈 준비가 되어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한 무리의 백패커들과 여행자들은 선착장 앞에 서 있던 버스를 타고 이내 사라졌고, 우리는 호기롭게 설영지까지 걸어가 보기로 하고 버스가 떠난 언덕길을 따라가 보았다.


 그날의 설영지는 서포리 해안이었다. 서포리 해안은 인천의 여러 해변 중에서도 길고 부드러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해안 너머로는 100년이 넘는 노송들이 펼쳐져 있단다. 긴 세월을 이고 오랫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킨 나무들과 드넓은 바다의 풍경은 분명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었다.


 서포리 해안에 도착하니 마침 썰물 때라 바닷물은 먼 데까지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백사장이 더욱 넓고 시원해 보였다. 이 드넓은 곳 어디에 텐트를 치면 좋을지 찾다가 해변 앞 푸른 언덕에 설영을 하기로 했다.




 해변에서는 아직 여름의 냄새가 났다. 햇빛은 뜨거웠고 그 빛을 받은 윤슬은 한여름만큼이나 반짝거렸다. 바다에는 가는 여름이 아쉬운 몇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한여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물기 없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텐트 아래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없이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나의 마음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굳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여름의 흔적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되는 시간이었다. 



  달콤한 청포도를 먹으며 그렇게 섬의 시간을 보내다 이번엔 좀 걸어볼까 싶어서 해변가에 군락을 이룬 해송을 보러 갔다. 서포리 소나무 숲은 걷기 좋은 길이었다. 소나무 사이로 데크길과 오솔길이 아담하게 이어져 있어서 은은한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텐트로 돌아가니 햇빛은 적당히 식어있었다. 딱 낮잠 자기 좋은 온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텐트 안으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낮잠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고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다. 그날의 저녁은 파스타와 와인 한 잔. 비화식을 위해 준비해 간 발열 도시락에 감바스 밀키트와 미리 삶아간 파스타면을 넣으니 맛있는 한 끼가 금방 준비되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특별한 일몰이 하나쯤 있으리라. 나에겐 덕적도에서의 일몰이 그렇게 특별해졌다. 해는 와인잔에 빛 몇 조각을 남겨두고 분홍과 주황의 아름다운 노을을 만들더니 이내 산 너머로 사라졌다. 노을이 지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아름다운 빛들이 남아 하늘을 물들이고 바다를 물들였다. 나는 그 빛들이 사라지고 별이 하나둘씩 떠오를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지고 나서도 오래고 여운이 남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를 걷고 정리를 했다. 배낭을 다시 메고 우리가 머물렀던 곳을 돌아다보니 오간 흔적 없이 자연의 품에 머물렀다 가는 것에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서포리 해변을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가던 길. 도로에 가득 심어져 있던 목백일홍의 붉은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들어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그 꽃들이 다음에도 섬의 시간을 즐기라고 속삭이는듯했다. 아무 걱정 말고 그저 늘어난 시간을 선물처럼 받아보라고. 섬의 시간은 바다와 노을, 바람과 별에 머물러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늘어난 시간 덕분에 섬에서 머문 우리의 몸과 마음도 넉넉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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