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역에서 사북역으로, 정선 하늘길을 걷다
겨울도 끝을 향해가면 산을 향한 마음이 커져간다. 겨울이 가기 전에, 눈이 녹기 전에 산에 한 번 더 가고 싶은 마음. 한없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걷고 싶은 마음. 걷다가 지치면 하루 쉬어갈 곳을 찾아 조용히 텐트를 피고 싶은 마음. 산과 산이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며 차가운 별을 세고 싶은 마음. 그런 저런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그래 봄이 오기 전에 겨울 산을 하염없이 걸어보자.
정선에 가는 열차에 올랐다. 정선 하늘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도롱이 연못에서 하루 묵어갈 계획이었다. 하늘길은 정선 백운산 정상에 펼쳐진 산길이다. 이 길은 운탄고도를 품고 있어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운탄고도는 예전에 석탄을 싣고 달리던 차들이 오가던 길로 영월 청령포에서 시작해서 삼척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다. 특히 만항재에서 화절령을 거처 가는 40Km가량의 길은 아름다운 야생화와 아득한 산의 절경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중에서 밸리 콘도에서 출발해 무릉도원 길, 백운산 마천봉, 고산식물원, 도롱이 연못을 거쳐 마운틴콘도에 이르는 약 10km의 트레킹 구간을 걷기로 했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열차는 세 시간가량 후에 고한역에 도착했다. 낯선 역에 도착하는 기분은 언제나 늘 설렌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각자 하루치 짐을 지고서 역사를 걸어 나왔다. 역 주변으로 식당과 편의점 등이 몰려있었다. 편의점에 들러 몇 가지 간식을 산 후 버스 정거장을 찾아갔다.
벨리 콘도에는 스키나 보드를 타며 마지막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지나 콘도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을 향해 걸었다. 벨리 콘도 뒤편에 살짝 경사진 곳을 오르면서도 약간 숨이 찼다. 이 겨울 동안 산을 너무 안 올랐다며 남편과 나는 시간 날 때 부지런히 운동하자고 다짐했다. 늘 등산의 초반은 부족했던 운동 고해성사가 이뤄진다. 콘도가 뒤로 멀어져 가자 어느새 밸리콘도에서 도롱이 연못까지 이어지는 하늘길 코스 시작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 동안 우리가 걷게 될 10여 킬로의 길은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등산화를 고쳐 메고 아이젠을 착용했다. 자 이제 시작이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울리며 우리의 걸음이 숲의 공간을 채운다. 한참을 걷다 보니 겉옷이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외투를 벗고 땀을 식히며 산을 올라가며 주변을 둘러보니 계곡 군데군데 얼음이 녹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숲은 참 부지런하다 싶다. 봄은 하루 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가 어느 나무 아래서 쉬기로 했다. 한참 동안 산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허기가 지거나 한 걸음 내딛기도 벅차고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에너지바나 달콤한 젤리, 휴대하기 간편한 과일 등을 챙기는 편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간식의 힘을 빌어 산을 오른다. 특히 사북역 앞 편의점에서 샀던 귤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백운산 정상 마천봉에 이르니 어느새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두 시간 정도 더 간다면 계획했던 도롱이 연못에 텐트를 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오랜만의 겨울 산행이기도 했고 초행길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또한 계획이란 바뀌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산과 마을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아름다운 순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배낭에서 우모복을 꺼내 입고서 해가 좀 더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텐트를 쳤다. 해가 떨어지면서 기온도 함께 내려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겨울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견딜만했다. 작은 집을 만들고 나니 작고 얇은 텐트가 한없이 아늑하다. 차가운 겨울밤 속에서 이렇게 하룻밤 보낼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순간이었다.
집을 마련했으니 차가운 뱃속도 따뜻하게 데워줘야겠지. 가져간 발열 도시락으로 저녁까지 간단히 먹고 나니 온기가 올라온다. 주머니 속 핫팩의 온기에도 행복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밥도 먹고 몸도 어느 정도 데워졌으니 그럼 이제 별을 만날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실은 텐트를 치는 순간부터 밤에 만날 별들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었다.
텐트 문을 열고 나오니 사방이 온통 컴컴한 가운데 멀리 내려다보이는 스키장의 슬로프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이 불빛이 너무 환해 별이 안 보이는 건 아닐까. 잠시 동안의 걱정은 하늘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이미 겨울밤 하늘엔 별들이 총총했다. 별들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다보니 하나둘씩 더 많은 별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먼 곳에 사는 별들이 각자 빛을 내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그렁그렁 채우고 있었다. 추워서 발을 동동 거리면서도 오랫동안 별을 세었다. 이 순간의 이 별빛은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겨울밤은 길었고 별들은 오랫동안 빛났을 것이고 우리는 오랫동안 잠을 잤다. 일찍 잠든 덕분에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어떤 날은 일찍 일어나도 자욱한 안개와 구름 때문에 일출을 못 보기도 하고 이렇게 운이 좋은 날은 눈을 뜨자마자 산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기도 한다. 산에서 만나는 해는 늘 경이롭다.
이제 슬슬 다시 도롱이 연못을 향해 걸을 때다. 각자의 짐을 서둘러 정리하고 새로운 날 새로운 걸음을 시작했다. 산정의 밤은 일상에 지친, 산행에 지친 여행자를 보듬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제는 더 걷기 힘들었다면 오늘은 새로운 걸음에 힘이 실린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모든 것들이 신비롭게 빛나는 아침이었다. 눈밭에 쏟아지던 햇살과 나무 그림자에도, 산돼지퇴치목탁종에도,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에도 햇살은 내려와 있었다. 새로운 풍경을 보다 보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어느덧 도롱이 연못에 도착했다.
도롱이 연못은 1970년대 갱도가 지반 침하로 주저앉으면서 만들어진 생태연못이다. 광부 아내들이 연못의 도롱뇽이 살아있으면 남편도 무사할 거라는 믿음으로 기도했던 데서 도롱이 연못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얼어붙은 연못 위로 하얀 눈이 내려앉아 이곳에 연못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롱이 연못 둘레에는 키 큰 나무들이 다정한 벗들처럼 서서 사이좋게 햇빛을 나누어 받고 있었다. 하늘 위로 뻗은 가지와 눈 밑으로 깊이 뻗어있을 뿌리의 거리는 멀어 보여도 약간의 바람만으로도 서걱서걱 흔들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도 다정히 그 나무 아래 앉아 달콤한 귤을 나눠먹었다.
이제는 하산할 일만 남았다. 사북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한 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연못을 돌아 마운틴콘도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꽃꺼끼재로 향하는 운탄고도 5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다음번에는 만항재에서 출발해서 운탄고도를 쭉 따라 올라가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하산하면서도 다시 이곳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푸른 신록이 가득할 때, 이곳에 가득하다는 야생화들을 만나고 싶다.
하산 후에는 쉽사리 택시를 못 잡아 사북역까지 걸어갔다. 비록 다리는 아팠지만 1박 2일의 모든 여정을 무사히 마친 기쁨이 몸의 노곤함을 앞섰다. 뭔가 뿌듯하고 다정한 느낌 같은 것이 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만날 수 있었던 설경과 산의 너그러움을 만나고 온 덕분일 것이다. 또한 무거운 배낭을 내려두고 맛있는 밥에 막걸리 한 잔을 하고 야무지게 아메리카노까지 마신 덕분이기도 할 테고.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리며 다시 이곳을 찾게 될 언젠가를 떠올리며 역사를 둘러보았다. 다음에는 낯선 곳이 아니라 그리운 장소가 될 테고 우리는 첫 산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는 눈이 가득했는데 하며 그리운 순간들을 나누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