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제주에 가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여름을 기다려왔다. 여름이 가고 나면 그리움이 시작된다. 하얀 눈이 바다에 스며드는 계절에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해변을 걸을 때에도, 봄날의 꽃이 산천을 축제로 만들 때에도 계속 여름을 기다린다.
여름의 가벼움이 좋다. 무겁게 누르던 생각과 감정, 의무 같은 것들도 여름은 가볍게 만들어준다. 뜨거운 햇빛으로 적당히 증발시키고, 소금기 어린 바람으로 적당히 말려주고 시원한 빗방울로 씻어낸다. 그러다 보면 무거운 것들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날아가고 손에는 한 줌의 상큼한 여름만 남는다. 그렇게 가벼워지길 바라며 여름을 기다려왔다.
여름엔 모든 감각이 깨어난다. 얇아지는 옷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때,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볼 때, 해변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햇살이 낙하하는 것을 볼 때, 차갑던 바다의 온도가 부드럽게 바뀐 것을 알아차릴 때,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바다에 둥둥 떠다니며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때,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리 달아날 때의 불안과 생기를 느낄 때, 종일 내리는 비에 조용히 하루를 정리할 때 굳었던 감각이 스르르 기지개를 켠다. 이제 마음은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그러고 나면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 담아두고 싶은 것들을 느끼고 모아둘 수 있다.
여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줄곧 생각한다. 여름의 감각을 깨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어디일까. 무거워진 나를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만들어줄 곳은 어디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곳엔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고, 가까이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나 숲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하니 적당한 카페도 한 두 곳 있으면 좋을 테고, 또 뭐가 없을까. 매일 음식을 사 먹지는 않겠지만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한 두 군데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고 밤이면 컴컴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별도 보고 하늘도 실컷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리고 운전을 해서 내가 원하는 곳을 아무 데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 이런 곳이 없을까. 한 때 나의 여름을 살았던 발리나 치앙마이. 그곳도 참 좋았지만 내가 원하는 최적의 여름을 보내기엔 한 두 가지가 아쉽기도 했다.
그러다 제주. 여름이면 더욱 푸른 섬. 여름의 제주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고, 푸르고 정겨운 오름과 숲이 넉넉하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과 시장이 있고, 감각 있고 향긋한 카페가 해안가 및 제주 곳곳에 생겨나고 있으니, 거기다 돌담길을 둘러싼 조용한 제주의 시골 마을엔 높은 건물도, 눈부신 간판들도 없어 오롯이 여름밤을 느끼기엔 최적이다. 생각은 결국 돌고 돌아 언제나 제주였다. 여름이면 그렇게 제주를 찾았다. 그사이 꼬꼬마였던 아이들이 어느새 내 키보다 크게 자랐다. 여름 제주에서의 날들은 시간을 돌려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언젠가는 여름도 끝날 것이다. 청량한 여름의 기포가 톡톡 터지며 시간을 타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여름을 만나러 간다. 여름의 제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