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오름자연휴양림
여름 숲에서의 캠핑은 언제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무성한 초록빛 그늘 아래에 텐트를 치고서 여기저기 바람이 잘 통하게 장비들을 잘 정리해 두고 캠핑 의자에 기대고 앉아 하늘을, 숲을 바라보노라면 소소한 걱정거리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여름 숲에서의 캠핑은 더위란는 강적이 있기에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제주도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에서의 캠핑이라면 더위도 두렵지만은 않다. 여름 제주는 뜨겁지만 이곳 중산간 허리쯤에 있는 붉은 자연휴양림은 숲이 짙어 그런지 해안보다 많게는 8도까지 기온차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니 뜨거운 여름이라도 중산간에서의 캠핑은 분명 매력적이다.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은 주변에 붉은오름부터 물찻오름 등 많은 오름과 절물자연휴양림, 교래자연휴양림 등의 아름다운 숲들 사이에 있다. 이 숲에는 수령 50년 이상의 오래된 나무들이 많아 휴양림 입구만 들어가도 숲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휴양림 내에는 데크로드가 있어 가볍게 걷기도 좋다. 캠핑센터에는 온수 샤워도 가능해서 여름에 제주 동부와 남부 쪽 캠핑을 계획한다면 이곳을 베이스로 다녀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았다.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에서 세화 해변까지는 45분 정도 걸린다. 휴양림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커피를 내려 세화로 가는 길.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삼나무가 울창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새 파란 바다가 마을 아래에 펼쳐진다. 이윽고 만난 바다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아이들은 저마다 튜브를 하나씩 들고 바다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부터 꾸준히 제주도를 찾았는데 어느새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이곳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켜켜이 쌓여가는 추억이 우리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데려갔다가 미래의 어느 순간도 상상해보게 하니 말이다.
오전엔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엔 휴양림 캠핑장에서 여유를 부려본다. 여름의 특권은 낮이 긴 것이다. 오후 늦게까지 햇살에 눈부시다. 그늘 아래에서 햇살이 길어졌다 짧아지며 사라지는 것을 보는 일이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이른 저녁으로 마트에서 사 온 제주 오겹살을 구워 먹고 책도 읽고 숲의 노을도 구경했다. 그렇게 평온하게 캠핑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이번 캠핑의 하이라이트는 철수하는 날 새벽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잠결에 언뜻언뜻 들리는 빗소리.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의 소리. 자주 바람이 캠핑장을 휘돌아 나갔고 잠들었던 의식은 깨어나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좀 그치면 철수해야겠다 마음먹었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 중산간을 휘몰아가는 비에 꼼짝없이 갇힐 것 같은 걱정에 쉘터 안의 짐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접고, 의자를 접고, 코펠 등을 정리하여 배낭에 넣고, 텐트를 접었는데 텐트 바닥 밑으로 빗물이 들어와 고여 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우비를 갖춰 입고 짐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비가 정말 많이 내릴 때는 우비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짐을 몇 번 나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도 손을 보태 마지막으로 쉘터까지 무사히 정리할 수 있었다. 흠뻑 비에 젖은 상태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차로 몸을 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근처 카페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안개가 문제였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중산간의 안개라니. 비상등을 켜고 카페를 찾아가는 길는 평소보다 더딜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 무사히 도착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니 걱정은 비와 함께 잦아들었다. 마침 안개도 불안을 데리고 걷히고 있었다. 카페 창가에 맺힌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마음엔 환한 등불이 켜진다. 그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 속에서 무사히 철수를 마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삼나무길 2차선 도로를 거북이처럼 천천히 달려 무사히 여기, 카페에 도착했으니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사였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결국은 다 잘 될 거라는 희망에 대한 희망 같은 것.
아무튼 나는 2024년의 중산간 여름 캠핑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미래에 여름이 또 찾아올 때, 제주 숲과 내 마음의 색과 온도가 비슷해지면 중산간의 숲으로 캠핑을 계속 다닐 것만 같다. 비가 오면 철수하기 쉽게 좀 더 가볍게 짐을 꾸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