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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느리지만 천천히 내 마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나를 키우며 산다

내 마음은 남들보다 천천히 자라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 빨리 역할을 덧입어서 내 안의 아이가 자라지 못했다. 2살 터울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나는 맏이로, 언니로 살아야 했고 충분히 누리지 어린아이 시절은 내 안에 봉인되어 버렸다. 그렇게 돌봄 받고 싶은 욕구는 내 마음속 상자 안에 꽁꽁 가둬둔 채, 잘하는 사람, 잘 해내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그렇게 초등, 중등. 고등을 지나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늘 모범적인 사람으로 살려는 것이 내 삶의 태도이다 보니 어린아이 시기에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넘어간 듯하다. 사춘기에 해볼 법한 반항이나 일탈도 행동으로는 없었다. 고등학생 때 학교 앞 만화방에 한 번 간 것이 유일한 일탈이라고 손꼽을만한 기억이다. 그때 만화방에 갔다 온 후 뭔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얼마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지... 


그리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사십 대가 되었을 때 갑자기 한 연예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K-POP 보이그룹의 어떤 멤버였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 멤버의 모습에 말 그대로 홀딱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그 가수가 출연한 자료를 하루종일 보기 시작했다. 그 그룹은 벌써 활동 10년 차에 접어든 그룹이었으니 그동안 쌓인 영상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한동안 무수히 많은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를 만나서 요즘 00에게 빠져 있다고, 너무 좋다고 들뜬 표정으로 말했더니 친구가 우리 나이에 무슨 연예인을 그 정도로 좋아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 적이 있다. 좀 머쓱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좋은걸. 그때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10대 청소년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광란의 감정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나이 사십에 말이다. 그때 느꼈다. 사람마다 속도는 다르지만 겪어야 일은 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구나. 사춘기를 안 하고 지나간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혹은 어른이 되어서 그때 뒤집어진다더니 이것도 비슷한가 싶었다. 십 대 시절 한 번도 콘서트를 가본 적이 없었는데  손으로 처음 전국투어 행사를 예매하고 20대들 사이에 어색하게 혼자 앉은 아줌마인 모습을 본다. 나에게는 이제 순간이 찾아왔는걸. 한번 해야 할 일은 하고 지나가야 하는 게 인생인가 보다. 


그리고 그다음 찾아온 것은 미혼남녀의 데이트 프로그램이었다. 여자 출연자, 남자 출연자들이 나와서 몇 박 며칠 동안 서로를 탐색하고 만남과 대화를 가지고 그리고 최종 커플을 탄생시키는 프로그램이다. 한동안 그 프로그램에 빠져서 멤버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시청을 했다. 매주 티브이에 빠져들 듯이 몰입해서 보고 있으면 남편은 "그게 그렇게 재미있나?" 하면서 역시나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응. 재미있어."라고 하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거 같다. 아, 내 발달단계가 이제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나 보다. 결혼대상자를 찾고 고르고 갈등하고 선택하는 그 단계에 내 마음이 이르렀나 보다 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아니지, 저 사람의 저런 점은 괜찮지, 저건 치명적인 단점이지, 저 사람보단 저런 사람이 낫지, 저건 극복하기 힘들 텐데....' 무수한 내적 상상을 하는 내 마음속에는 과연 내가 배우자 선택을 잘했는지, 다시 돌아가도 이 사람을 선택할 것인지 어쩌면 내 선택을 후회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여러 가지 마음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몰입해서 보던 싱글 남녀 프로그램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다. 내 마음속에서 내가  선택한 배우자에 대한 마음의 정리와 결론이 어느 정도 내려진 시점이었다. 나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이고 나자 더 이상 흥미가 없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10대의 발달경험인 연예인도 20대의 발달경험인 데이트 프로그램도 나를 지나쳐 갔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겪어야 할 일을 겪은 것이다. 남들보다는 좀 늦은 시기지만 천천히 내 삶은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닐까. 남들보다 좀 느리면 어떤가. 자라고 있다면, 성장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면 조금의 빠름과 느림은, 그 정도는 융통적인 게 인생이 아닐까


요즘 나는 상가주택에 관련된 유튜브를 많이 본다. 에릭슨은 성인기의 발달과업이 생산성이라고 했는데 상가나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어찌 보면 생산성과 연결되는 듯도 하다. 

그렇게 내 마음은 느리지만 분. 명. 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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