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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업제안서는 무보수일까

노동과 놀이 사이

해가 바뀌고, 2월이 되니 각종 기관 담당자들의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올해 프로그램을 슬슬 준비해서 3~4월이면 시작해야 하는 사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개인상담 연락, 집단상담 연락, 미술심리 상담 연락 등등 그동안 잠잠하던 전화가 나름 바쁘게 울려댄다. 


프리랜서 분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프로그램 기획서, 제안서, 계획서 등을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기관에서는 일정이나 조건 등을 전화로 문의하고 서로 어긋나는 점이 없을 경우 정중히 요청한다. 

"계획서를 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보내드릴 수 있죠. 프리한 프리랜서인 나는 신나게 계획서를 적는다. 


요즘 업무의 절반은 그런 계획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일이라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어떤 활동이 목적에 맞을지 고민도 많이 하게 된다.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했던 지식과 경험을 총망라해서 계획서를 열심히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업제안서는 무보수일까?"

제출하는 사업제안서가 모두 채택되는 것은 아니다. 구두로 합의를 하고 계획서를 요청하는 경우에는 이미 강의나 교육이 결정된 이후 서류제출을 하게 되지만 초반에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일단 계획서를 내 봐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프로그램이 진행될지 여부가 미지수이다. 실컷 고민해서 작성한 프로그램 계획서를 제출했는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모시겠다든지 등등으로 채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실컷 계획서를 적어 제출했는데 검토 후 연락 주겠다고 해놓고 무산이 될 경우는 솔직히 김이 빠지기도 하다. 




최근에 인테리어 견적을 받으면서 비슷한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인테리어 견적을 요청하면 집에 방문해서 상담을 해주시고 실측도 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는 3D도면까지 만들어서 고객에게 제안을 해 준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모두 무보수라는 점이다. 대체로 3~4군데 이상 견적을 받게 되는데 이 분들의 시간과 인력을 제공받은 나로서는 참 미안한 일이었다. 계약을 한 업체는 방문상담이 투자가 되겠지만 나머지 분들의 시간과 노력은 어쩌나 말이다. 멀리서 오신 사장님께 내가 죄송해하자 "우리가 10군데 가면 계약률이 30프로도 안됩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어떤 사장님은 이렇게 말하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시기도 했다. 


프리랜서 상담사, 인테리어 업자 모두 잠재고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보수로.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잠재고객을 향한 영업을 유로로 진행하는 곳도 있다. 라식수술 상담이나 치아교정 상담이 그렇다. 이것 역시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의 거액의 상품을 의논하는 과정인데 사전검사와 상담이 무료가 아니고 비용이 청구된다. 그 병원에서 진행을 하기로 결정하면 초기 상담 비용을 상품비에서 공제해 주기는 하지만 의료인은 초기상담에도 수가를 부여한다. 의료서비스라서 그런가 생각해 보면 변호사도 상담비를 받는다. 이 차이점에 대해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노동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한가 보다. 왜 어떤 노동은 무급인지에 대해 내 마음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무급인 것은 노동이 아니라 유희나 놀이이지 않을까.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해 싫어도 해야 하는 일, 취미는 즐거움을 위해 보수와 상관없이 하는 일. 그 사이의 분류되지 않은 이상한 지점이 사업제안서라서 고개가 갸웃했던 거 같다. 해야 하는 일인데 돈이 안되니 말이다. 그래서 사업제안서를 쓰다가 미뤄두고 돈 안 되는 브런치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건 돈은 안되지만 즐거운 일임에 확실하다. 적어도 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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