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5월이 힘든 이유
출발은 엄마가 나르시시스트였다는 것이다. 아빠는 평생 주도권을 가진 엄마에게 조종, 통제당하며 살았다. 엄마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지시에 가끔 버럭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빠가 감정을 표현하는 전부였다. 엄마의 폭발적인 분노와 퍼부음을 아빠는 묵묵히 감당했다. 엄마는 남편을 의식하고 집착하고 통제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은 역기능적이었고 그것은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가장 닮고 많은 영향을 받는 아이였으며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집착하고 기대하고 편애하면서 자신의 요구대로 휘두르고 싶어 하는 자녀, 골든차일드의 역할이었다. 엄마의 기대는 공부에 있어서 특별했고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공부하고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는 것을 삶의 목표이자 가치관으로 삼았다. 역기능 가정의 희망이 되어줄 영웅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동생들 역시 엄마와 정서적으로 밀착되어 대변인의 역할을 했다. 막내는 중립적인 중간자 역할을 했다. 이 조합의 핵심에는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있다.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사 남매는 모두 정서적인 학대를 당했다는 점이다.
엄마의 양육이 학대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고 '너희를 위해서, 다 너 잘되라고 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엄마는 본인은 잘못이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중년이 된 동생들은 엄마의 리모컨으로 살고 있다. 아침저녁 수시로 연락하는 것은 기본이고 엄마가 우울해하고 밥을 잘 못 먹으면 자녀들은 먹을 걸 사 오고 각종 먹거리를 택배로 보낸다.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대신 예매하고 팬클럽에 가입해서 공연관람 신청을 한다. 엄마가 아프면 언제든 달려와 병원에 데려가고 필요한 걸 사다 나른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엄마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엄마의 잔소리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자녀들은 움직인다. 그런 자녀들을 보며 엄마는 뿌듯해하고 만족한다.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위한다는 것이다. 엄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고 무엇이든 한다는 것이다. 자기애가 충족되는 순간이다. 그런 상황을 나르시시스트 엄마 스스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녀는 본인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자랑을 위해, 자신의 필요를 위해 자식이 필요하고 그런 존재로 만들어가며 키운다. 자신의 기대와 틀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자식은 반역자이고 천하의 나쁜 놈에 불과하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자녀들이 갈등하고 경쟁하게 만든다. 이기적인 나르 부모는 자신이 모든 것을 받고 누리고 싶어 한다. 자녀들끼리 친하기보다 자신이 첫째와 밀착되고 자신이 둘째를 이용하고 자신이 셋째를 조종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부모 자녀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를 빼고 자식들끼리 유대하기를 본능적으로 원치 않는다. 그래서 첫째가 이것을 사주더라, 둘째가 이렇게 나를 돌봐주더라고 다른 자식들에게 말을 함으로써 더 잘하려고 경쟁을 시킨다. 그리고 나르 부모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게 만든다. 결국 자신의 욕구를 위해 자식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부모도 자녀를 이용해서는 안된다. 이용은 학대이다.
엄마의 사랑이 불편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준다. 아이는 빨간색을 달라고 하는데 파란색을 준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나 많이 주었는데 왜 그러냐고. 핵심은 상대방인 아이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부모가 나르시시스트면 자기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상대방인 아이는 상처받는다. 그것이 정서적 학대임을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의 불안 때문에 자녀를 조종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엄마.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자식들이 있어주길 바랐고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야 직성이 풀렸던 엄마. 농장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것을 통제해야만 했던 엄마.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자식은 농장의 힘없는 가축에 지나지 않았다. 험한 산을 뛰어다닐 호랑이도, 하늘을 날아다닐 독수리도, 멋지게 사냥을 하는 곰도 모두 목줄을 하고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 그것이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원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안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호랑이 답게 키우고 곰을 곰답게 키우는 것에 관심이 없다. 어떤 맹수로 태어났든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모두 자신의 울타리 안에 끼워 맞추어 사육하려 한다. 호랑이도 독수리도 곰도 모두 타고난 종의 특징은 잃어버린 채 동물원 우리 속의 동물들처럼 살아야 했다. 타고난 멋진 기질과 화려한 장점은 모두 잃어버렸다. 그것은 안전하고 잘 통제되어 있지만 자유와 자연스러움이 말살된 비윤리적인 동물원과 같았다.
과보호된 자녀들은 스스로 살아갈 힘을 잃고 자신도 믿지 못하고 타인도 믿지 못하고 관계 맺음이 어려운 상태가 된다. 부모의 통제 안에서만 있는 성인아이로 자라는 것이다.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면서 근육도 다 빠지고 송곳니도 약해졌지만 나는 엄마가 원하는대로 자라야 하는 가축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어른이 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엄마와의 이야기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마음의 말을 편지로 써본다.
엄마, 미안하지만 나는 강아지가 아니라 호랑이였어.
엄마가 원했던 강아지로 살지 못해 유감이야.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미안하지 않아.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강아지로 살기를 원했던 것은 엄마의 바램이었잖아.
내 뜻은 아니었어.
그렇게 원하는 것은 엄마의 자유이지만 나에게도 자유가 있어.
엄마의 뜻을 따를지 말지는 나의 선택이야.
여기저기 삐그덕거리게 된 성격때문에 잘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힘겹더라도 내 인생을 살아갈거야.
그동안 고마워.
하지만 엄마를 만족시키려는 강아지는 더이상 없을거야.
받아들이든 그러지 않든 그것 역시 엄마의 자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