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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국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인연을 끊다

가족과 이별중입니다

나르시시트가 부모라면 그 끝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셈이다. 

자녀가 자의식이 생기고 간섭을 거부하다가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평생을 나르 부모의 희생양이나 감정 쓰레기통, 혹은 트로피로 살아야 한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잘나고 똑똑한 딸, 야무지고 능력 있는 딸, 그러면서 엄마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위하는 딸이 되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 내가 내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엄마는 나를 마음속으로부터 독립시키지 못했다. 엄마는 나이고 나는 엄마였다. 경계가 없었고 매일 전화하고 연락하고 이것 해라, 이렇게 해라, 얼른 해라 지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때부터 나에게는 슬슬 싫다는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 싫다. 내가 알아서 할 텐데'

엄마의 지시를 받고 전화를 끊으면 항상 묘하게 불쾌했다. 엄마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더 기분 나쁜 것은 엄마의 지시가 내가 보기에도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것을 선택해서 했다는 주도성 없이, 엄마가 하라는 대로 결국 하게 된다. 간혹 엄마 말을 들었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후회를 하게 될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엄마 말을 들었던 나 자신에게 짜증이 올라왔다. 


그런 즈음이었던 거 같다. 내 나이 서른 중반이 되었을 무렵. 나는 엄마에게 자꾸 선을 그었다. 

"엄마 이건 손대지 마. 엄마 이건 하지 마.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아이 둘을 키우면서 맞벌이를 하던 때라 엄마가 가끔 와서 육아나 살림을 도와주었다. 감사한 일이지만 엄마의 선을 넘는 오지랖과 동일시라는 대가가 따라왔다. 경계선이 없던 엄마는 내 살림을 본인의 살림처럼 본인이 생각한 대로 '나를 위해서' 지나치게 하셨다. 그것도 싫었던 거 같다. 나를 위해 엄마가 희생한다는 느낌, 고생한다는 느낌도 싫었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잘해주면서 조종하려는 엄마와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던 거 같다. 나에게 점점 마음의 힘이 커지고 있는데 엄마는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생각했고 자신의 심장이 밖으로 나와서 걸어 다니는 존재인 것처럼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전쟁이 터졌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전화로 대판 싸우게 되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엄마는 멈추지 않고 계속했고 그것에 대해 내가 따지고 대들었다. 엄마 역시 화가 나 퍼부으면서 서로 감정이 극을 향해 치달았다. 서로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나와 엄마는 결국 대판 싸우고 더 이상 보지 말자고 인연을 끊는 마지막 최후통첩을 했다. 그때 나는 엄마와 정말 죽을 때까지 보지 않으리라는 모진 결심을 했던 것이다. 


결국, 엄마와 아름다운 이별은 불가능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거리 두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같은 싸움을 하고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야지 나로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살기 위해서 엄마를 끊어낼 수밖에 없다면 나는 그 편을 택해야겠다 싶었다. 엄마가 나이고, 내가 엄마인 삶의 끝은 결국 전쟁같은 이별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를 악물고 나는 엄마와 단절을 했다. 무려 10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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