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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K장녀의 집안일

너무 일찍 역할을 덧입었다

4남매의 맏이이자 큰딸이라는 것은 일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장사를 하느라 바빴던 엄마가 네 명의 아이를 키우려면 큰딸은 작은 엄마 노릇을 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무수히 많았던 집안일들이 떠오른다. 

걸어둔 마늘 몇 개 가져오너라, 두부 한 모 사 오너라 등등 심부름이 많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 당시는 집집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전화심부름도 있었다. "숙아, 문 씨 집에 가서 전화받으러 오라 해라." 하면 나는 길 끄트머리에 있는 문 씨 집에 달려가서 "아줌마, 우리 엄마가 전화받으러 오래요."라고 말을 전하곤 했다. 식육점 가서 소고기 국거리 얼마어치 사 오너라 등등의 심부름을 하느라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곤 했다. 

또한 그 당시는 연탄으로 난방을 했는데 때마다 연탄을 갈아줘야 했다. 창고에 쌓인 검정 연탄을 연탄집게로 집어서 아궁이 앞에 가져온다. 불이 붙은 윗 연탄을 빼놓고 재가 된 아래 연탄을 들어낸다. 불붙은 연탄을 다시 넣고 그 위에 새 검정 연탄을 올려둔다. 가끔 연탄 두 개가 붙어서 한꺼번에 딸려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병으로 탁 쳐주면 연탄 두 개가 떨어진다. 어떻게 아냐면 내가 무수히 많이 해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기억들이 내 몸에 각인되듯이 기억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연탄을 올릴 때는 구멍을 잘 맞춰야 불이 잘 붙는다. 가끔 연탄불을 꺼트리면 번개탄을 써서 다시 불을 붙여야 했다. 그리고 불조절하는 마개가 있었는데 그걸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공기와 연탄불 세기를 조절했다. 숙아, 연탄 좀 갈아라, 불구멍 두 칸까지 열어라 닫아라 이런 건 의례히 내 몫의 일이었다. 시간 맞춰 매일매일 꼬박꼬박 연탄을 갈면서, 마개를 조절해 가면서 수고스럽게 살았다. 그때는. 

온수는 또 어떤가. 연탄아궁이에 갈색 고무통인 온수통이 있어서 거기에 물을 담아 데워 썼다. 세로로 긴 고무통 옆구리에 구멍이 두 개 있어서 아궁이 뚜껑과 호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윗구멍으로 물이 들어가고 아래 구멍으로 데워진 물이 들어오고 이랬던 거 같다. 이 두 구멍위치 보다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항상 물을 채워놓아야 했다. 나는 바가지로 물탱크의 물을 퍼서 온수통에 붓곤 했다. 시키나 시키지 않으나 늘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나는 집안을 둘러보고 으레 해야 하는 일은 묻지도 않고 의례히 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처럼 말이다. 

물탱크는 또 어떤가. 부엌 한쪽에 시멘트로 조적식으로 쌓은 커다란 물탱크에 물을 받아놓고 썼다. 매일 물 나오는 시간이면 고무호스를 걸치고 물을 받았다. 넘치기 전에 호스를 잠가야 했다. 깜박 잊고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으면 물이 넘쳐 철철 물바다가 되었다. 


내 나이 초등시절 무렵부터 나는 무수한 집안일과 함께 살았다. 콩나물을 다듬고 삶은 꼬막을 까고 그런 거는 집안일 축에 끼지도 못하는 일상이다. 10살 무렵 막내가 태어났는데 학교 다녀오면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이렇게 저렇게 동생들을 돌보는 일, 말 안 듣는 동생들을 훈육하는 일 등등이 자연스럽게 장녀의 몫이 되었다. 나도 고작 10살 어린아이였는데 말이다. 


가끔 티브이에서 7남매, 9남매 등 다둥이 가족이 나온다. 그런 경우 맏이, 특히 맏딸은 어김없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 짊어지고 있다. 본인도 아이이고 자식인데 부모는 자연스럽게 첫째 아이에게 자신들의 짐을 지우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조금 이기적인 행태이다. 부모는 본인들이다. 자신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내도 모두 돌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녀를 돌보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그것이 첫째든, 막내든 말이다.  동생이 태어나 상실감에 빠져 있을 먼저 태어난 아이의 마음을 알아봐 주는 것도 부모가 할 일이다. 하지만 많은 부모는 오히려 네가 크니까, 네가 언니니까, 형이니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부담과 짐을 지운다. 이것은 분명히 부모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다. 


부득이하게 자녀들이 부모의 몫을 함께 나눠져야 할 경우가 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집들은 먹고살기 바빴고 자식들을 버리지 않고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걸로 벅찬 집들도 수두룩했다. 때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고 학교를 보내는 것만 해도 고마운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식이 작은 부모가 되어 돌봄의 역할을 덧입고 살게 되더라도 절대 그것은 당연한 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원래는 이러지 않아야 하나 가정형편상 어쩔 수 없이 이리되었으니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마음이라도 그 부모역할을 하는 아이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그까짓 게 뭐 힘들었다고,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살았지, 그러지 않았으면 너희들 키우지도 못했다 등등의 말들로 부모역할을 한 아이의 힘듦과 노고를 일축해 버린다면 그 아이는 두 번 상처받게 된다. 어린 시절에 어린아이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애어른으로 역할을 덧입게 되었는데 커서도 힘들었던 감정과 수고를 수용받지 못하면 이 아이는 두 번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어린아이에게 짐을 지우고 감정을 수용해주지 않은 부모는 아이가 자라는 동안, 자라고 나서도 그 패턴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아이에게 무심했던 부모는 자라난 아이에게도 무심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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