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택 받은 맏이,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엄마는 자식에게 경계선이 없었다. 자식도 엄마의 삶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오고 노력했던 태도는 아이를 키울 때도 그대로였다. 엄마가 자식을 이렇게 분리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일부로 여길 때 아이도 역시 자신과 엄마의 경계를 짓지 못한다. 나에게 엄마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자 우주의 전부였고 엄마의 눈빛과 말투와 표정을 통해서 모든 세상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엄마가 화내면 내 세상은 온통 태풍이 몰아쳤고 엄마가 바쁘면 같이 분주히 움직였다.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엄마의 웃음을 보기 위해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애를 썼다. 나의 기쁨이 아니라 엄마의 만족을 위해서 행동했는데 그때는 내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만큼 나이가 드니 이제야 돌아보고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보는 엄마가 얼마나 나에게 있어 전부였는지는 어린 시절 나와 엄마의 관계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엄마는 첫딸인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을 쏟고 기대를 했다. 제일 처음에 태어난 아이는 엄마에게 제일 말도 통하고 심부름도 시킬만하고 그랬을 것이다. 엄마는 첫정이 큰 법이라며 맏이인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나는 나의 온 우주였던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나는 없이 엄마의 일부로 살았던 아이에게 엄마의 말은 세상의 전부였다. 나는 엄마의 심장의 일부처럼 엄마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의지했다.
어쩌면 엄마의 사랑은 일부는 사실이다. 엄마는 첫째인 나에게는 유명 메이커 책상을 사주었다. 동생들은 브랜드 없는 가격이 싼 책상을 썼다. 초등학교 입학 때 받았던 고급 책가방, 졸업식 때 받았던 튤립 꽃다발 등등 이 모든 것이 나에게만 주어졌던 특혜이기도 했다. 첫째인 내가 특별한 혜택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어쩌면 맏이의 운명이기도 했다. 받은 만큼의 대가도 분명히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돌아보며 엄마의 사랑이 전체가 아닌 '일부가'사실이라고 적게 된다는 것이 놀랍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기대'나 '혜택'에 가깝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다.
엄마의 이런 집착과 기대는 편애처럼 보이게 되었다. 두 살 터울 여동생에게 언니의 존재는 얼마나 눈에 가시였을까. 안 그래도 정서적인 면을 충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엄마인데 그 엄마가 첫째 아이에게 밀착되어 있으니 둘째의 마음 또한 가난했을 것이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욕심을 많이 부렸다고 한다. 과자를 나누어주면 언니 것이 많다고 떼를 썼다. 언니 것과 바꾸어 주겠다고 하면 그래도 언니 것이 많다고 울었다. 그 언니 역시도 엄마의 사랑이 충분하지 않아 허기져 있다는 것을, 모자라는 사랑을 받아보고자 애어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욕심 많은 둘째의 고집이자 투정이려니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의 사랑을 놓고 종종 경쟁을 했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가난한 마음이 기본 베이스였던 것이다. 엄마의 양쪽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 자기 쪽을 바라보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쳐다보면 동생이 샘을 내고 동생을 쳐다보면 내가 샘을 내고 해서 엄마가 가운데 천정을 봤다는 일화가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한 가지 중요한 일화가 있다. 동생이 종종 대들고 떼를 쓰고 나와 싸우곤 했다고 한다. 주로 큰 아이니까 네가 참으라, 양보해라는 기본 모드였지만 가끔 동생을 혼내야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동생을 야단친다는 것을 엄마는 보이기 위해 동생을 따로 방안에 불러서 야단을 쳤다. 그런데 실제로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동생과 짜고 야단치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막 소리를 치면서 나무라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 동생이 "아야, 아야"하면서 맞는 시늉을 했다고 했다. 아마 엄마는 첫째의 마음도, 둘째의 마음도 모두 가지기 위해 그런 쇼와 같은 연극을 했던 거 같다. 하지만 이런 엄마의 태도는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날도 엄마는 동생을 야단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내가 문을 열고 그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더라고 했다. 엄마가 동생을 가짜로 혼내는 장면을 본 엄마 밀착형 첫째 아이가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나의 전부이자 우주인 엄마라는 존재, 엄마가 내게 준다고 믿었던 사랑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어떤 말도 못 하고 나는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그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몹시 상처였던 그 순간을 어린아이가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을까. 감정을 느끼지 않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방어기제는 어쩌면 그때의 아픔에서 도망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감정이 메마른 엄마는 말라버린 우물과 같다. 아이는 목이 마르다. 허기가 지고 배가 고프다. 사랑한다고 집착했던 큰 아이도, 존재감 큰 경쟁자를 둔 둘째 아이도 모두 갈증이 난다. 충분하지 못한 사랑을 두고 경쟁하며 피 튀기게 싸우고 원망한다. 그 출발점이 엄마의 말라버린 감정, 넘치는 불안, 존재하지 않는 경계선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두 아이의 삶은 모두 고행이자 고난이다.
동생이 태어난 무렵의 어린 나에게 편지를 써본다.
어린 숙아, 동생이 태어났구나.
많이 놀랐지.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할 거야.
온전히 너만 바라보던 엄마의 돌봄이 훨씬 줄어들겠지.
속상하고 슬프겠구나.
불안하기도 할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긴장되지?
괜찮아. 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너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돌봐줄게.
무서운 너를 안고 다독여줄게.
넌 여전히 어린아이야. 넌 보살핌 받아야 해. 넌 아직 어려.
엄마가 너만 바라보지 않아도, 너만 사랑하지 않아도
엄마의 사랑이 둘로 나뉘어도
네 우주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너에게는 엄마 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단다.
괜찮아. 너는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