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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May 20. 2024

당신봄날 아침편지32

2024.5.20 류근 <두물머리 보리밭 끝>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차용하여 ’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바로 일 년 전만 해도 사월의 꽃봄 보다는 오월의 늦봄이 좋더니만, 어찌 올해는 자꾸만 지나버린 사월을 그리워하네요. 나이가 들수록 하루 한순간의 뒷모습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진하더니만, 저도 딱 그런가 봅니다. 나무들마다 초록이 무성해져서 건강한 청소년들처럼 우람해지기 시작했는데요, 동시에 그 아래에서 지고 있는 꽃잎들에게 눈길이 더 갑니다. 그래서 화려한 개화의 모습이 아니라, 누렇게 져버린, 구부러진 꽃잎 몇 송이를 모아서 사진으로 위로했습니다. ’나 라도 너를 기억하겠노라’하고 속삭이면서요. 반면에 가을 풍경처럼 노랗게 익어서 아름다운 작물도 있지요. 푸른 청보리는 온데 간데 없고, 익을대로 익은 황금보리를 어제도 들판에서 머무는 바람과 함께 사진에 담았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보리 지평선만 보아도 그냥 맘이 달래지더군요. 사실 어제 조금 화나는 일이 있었는데, 오는 길에 이 보리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남은 하루의 시간이 얼마나 허탈했을까 싶었지요. 다행히도 금새 마음이 풀어져서 저녁에는 지인들과 재밌게 놀았답니다. 휴일 후,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는 월요일이죠. 혹시 오늘 화나는 일이 생긴다면 심호흡 한번 길게 하고 가까이 있는 초록 산길이나 누런 보리밭으로 달려가세요. 당신 마음에 시원한 폭포수 길이 생겨나서 행복비타민이 가득 담긴 폭포 웅덩이가 금방 보일거예요. 오늘은 류근시인의 <두물머리 보리밭 끝>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두물머리 보리밭 끝 - 류 근     


해 질 무렵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는

바라볼 때마다 추억까지 황홀해지는 노을이 있고

아무렇게나 건네주어도 허공에 길이 되는

가난한 시절의 휘파람 소리가 있고

녹슨 십자가를 매단 채 빨갛게 사위어가는

서쪽 마을 교회당 지붕들마저 저물어 있다   

  

나는 자주 그 길 끝에서 다정한 생각들을 불러 모으고

구름은 기꺼이 하루의 마지막 한때를

내 가벼워진 이마 위에 내려놓고 지나갔다

언제나 나는 그 보리밭 끝에 남겨졌지만

해 질 무렵 잠깐씩 잔잔해지는 저녁 물살을 바라보며

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평화로웠다

쓸쓸한 시절은

진실로 혼자일 땐 동행하지 않는 법이었다     


바람의 길을 따라 보리밭이 저희의 몸매를 만들 때

나는 길 끝에 서서 휘파람 뒤에 새겨진 길을

천천히 따라가거나 물소리보다 먼

세월을 바라보았을 뿐  

   

거기선 오히려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사람으로 느리게 저물어서

비로소 내 눈물은 스스로 따스한 뉘우침이 되고

물소리는 점점 더 잔잔한 평화가 되고

서쪽으로 불어가는 생각들과 함께 나는

노을보다 깊어진 눈시울로 길 끝에 서서

아직 잊혀지지 않은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 날이 저물 때

멀리 가는 물소리와 함께

어디로든 한꺼번에 저물고 싶었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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