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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May 23. 2024

당신봄날 아침편지35

2024.5.23 김사인 <화양연화>

‘이력서‘... 컴퓨터 속 파일을 정리하다 발견한 저의 이력서. 어디에 사용했었는지 작년 이 맘때쯤 저장한 날짜가 보이더군요. 쓰인 내용을 쭉 읽어보았지요. 그런데 순간 허탈했습니다. 이력다운 이력이 없다고 느껴져서요. 동시에 어느 이력서 한 장이 떠올랐어요. 현재 모 대학 교수인데요, 그녀의 이력서에는 ’딱 한 줄’이 써 있었거든요. 그 한 줄의 이력으로도 자신을 다 말하고 있는데... 부족할수록 수식어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실(Fact)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력서에 써있는 여러 사항들을 지워봤어요. 한줄 한줄 지우면서 ‘아, 이때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때는 이런 자격증을 땄었구나. 이때는 이런 곳에서도 강의 했었구나...’ 그런데요, 한줄 한줄 지우다보니, 저는 ‘딱 한줄’로 저를 내세울 이력이 없는거예요. 그래도 아쉬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가장 오랫동안 해 오고 있는 일, 영어학원일과 영어교사자격증 정도랄까요.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기억이 저의 손가락을 붙잡아서 원본 파일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두 줄짜리 이력을 쓴 이력서 하나 더 만들어 놓고요. ‘과거이력으로는 영어공부한 학위과정과 현재이력으로는 책방대표’. 동시에 생각했지요. 이력서는 분명 과거와 현재의 기록이지만 ‘오늘도 내일도 과거’이니, 매일 ‘오늘 삶의 이력서 한 줄’을 잘 써 놔야겠다고요. 오늘 할 일 중 하나는 전주에서 열리는 ‘김사인 시인과의 인문학 만남’ 자리입니다. 표면으로 드러난 그분의 이력 말고, 오늘 만남에서의 그분 이력 한 점을 건져볼까 합니다. 

아침부터 줄줄이 하겠다고 약속한 일들이 쌓여있지만, ‘이런 움직임도 한 때겠지요, 고마울뿐이지요.‘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순간에 가벼워지네요. 오늘은 김사인 시인의 <화양연화>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들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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