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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Jun 07. 2024

당신봄날 아침편지50

2024.6.7 도종환 <접시꽃당신>

유월의 문을 활짝 여는 대표적인 꽃이 접시꽃이죠. 성격이 좋아 아무 곳에서나 피어나 오고가는 이들의 눈길,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접시꽃은 오로지 태양을 따라다니며 피어난다고 하는데요, 한자이름 ‘규화(葵花, 해바라기 규, 꽃 화)속에 그 뜻이 숨어있습니다. 옛 시인들은 이 꽃을 가르켜 임금(태양)을 향한 충성의 마음을 강조하는 시들을 썼더군요. 고려시대 목은 이색의 <촉규가>에서는 ’작은 담장 그늘에서 헛되이 늙더라도, 절로 마음 기울여 태양을 향하는 마음 끝이 없으리‘ 라는 싯구를 읽었습니다. 붉은빛, 흰빛, 분홍빛 등 타고난 고운 피부색도 미인의 한 모습이지만 날씬하면서 시원시원한 큰 키가 매력적이죠. 6월부터 한 여름 내내 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를 반복하여, 한 줄기 대에서 많은 꽃들이 잔치를 벌인답니다. 저도 며칠째 가는 곳마다 만나는 접시꽃을 그냥 지나 칠수 없어서 사진으로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눕니다. 유독 키가 큰 줄기에 피어나 해와 가장 친한 꽃잎에게서는 온전히 해의 사랑을 전달 받기도 하고요. 철을 잊지 않고 피어나서 우리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꽃들에게 일종의 예의를 갖추는 마음도 한 몫 하고요. 접시꽃하면 도종환시인의 <접시꽃 당신>이 생각나시지요? 아픈 아내를 비유,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해마다 접시꽃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 시는 애틋한 사랑의 징표처럼 사랑받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 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 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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