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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봄날 아침편지111

2024.8.7 김소월 <여름의 달밤>

by 박모니카

하루 사이에 가을이 왔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김춘수시인이 노래했는데, 저도 이 새벽에 ‘입추로구나’라고 불러주니, 정말 가을이 온 듯합니다. 올여름도 에어콘 없이 살아보자, 이깟 더위 길어봤자 2-3주. 오고가는 일상 루틴 속에 다 에어콘 천지, 우리라도 아껴보자... 라고 말했던 제 의견에 동의해준 덩치 큰 아들. 살짝 보니 어느새 가벼운 홑이불 하나를 걸치고 자고 있군요.


오늘은 제주도로 볼일이 있어 다녀온다길래, 여름을 잘 참아주고 있는 성품이 고마워서, 옷이라도 하나 사라고 했더니, 세일한다는 반 바지 두 개(2만원도 안되네요)만 집어들더군요. 요즘 밥 한끼에 1만원이 넘는 시대, 때론 ‘돈이 돈이 아니구나. 헛돈이야’하며 신음할 때도 많은데, 최소 1년이상 입어도 상처나지 않을 옷을 보면서, 또 이런 옷을 만든 제3세계 어린 손들이 생각나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네요.^^


말씀드린대로 오늘은 ‘입추(立秋)’ 가을이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보통 이때는 논의 곡식이 여무는 시기이니, 옛 사람들은 입추에 하늘이 맑으면 풍년을 기대했다지요. 농부들이 벼를 들여다보며 김 매기(논밭의 잡초나 풀 등을 제거하는 일)도 시나브로 끝나는 때라, ‘어정거리며 7월 건들거리며 8월’이라는 말이 웃음짓게 합니다. 오늘도 최고치의 폭염수치가 예보되어 있지만, 어느새 얼굴에 스치는 바람 한 점에도 쌀쌀한 정(情) 한 톨 남겨질 것입니다. 어제도 시내를 오며 가며 보이는 초록 들판에, 어수선한 마음 조각들을 던져버렸더니, 학생을 만나는 오후가 가벼워졌었지요.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을 때, 달력에 써있는 절기(節氣) 이름이라도 한번 읽어보면 이내 마음에 다른 불이 켜집니다. 내 안의 나에게, 내 밖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너그러워집니다. 이제 여름더위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입추’가 문을 두드렸으니, 서서히 우리도 가을맞이 하시게요.~

김소월시인의 <여름의 달밤>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여름의 달밤 - 김소월

서늘하고 달 밝은 여름 밤이여

구름조차 희미한 여름 밤이여

그지없이 거룩한 하늘로써는

젊음의 붉은 이슬 젖어 내려라.


행복(幸福)의 맘이 도는 높은 가지의

아슬아슬 그늘 잎새를

배불러 기어 도는 어린 벌레도

아아 모든 물결은 복(福)받았어라.


뻗어 뻗어 오르는 가시덩굴도

희미(稀微)하게 흐르는 푸른 달빛이

기름 같은 연기(煙氣)에 멱감을러라.

아아 너무 좋아서 잠 못 들어라.


우긋한 풀대들은 춤을 추면서

갈잎들은 그윽한 노래 부를 때

오오 내려 흔드는 달빛 가운데

나타나는 영원(永遠)을 말로 새겨라.


자라는 물벼 이삭 벌에서 불고

마을로 은(銀) 슷듯이 오는 바람은

눅잣추는 향기(香氣)를 두고 가는데

인가(人家)들은 잠들어 고요하여라.


하루 종일(終日) 일하신 아기 아버지

농부(農夫)들도 편안(便安)히 잠들었어라.

영 기슭의 어득한 그늘 속에선

쇠스랑과 호미뿐 빛이 피어라.


이윽고 식새리소리는

밤이 들어가면서 더욱 잦을 때

나락밭 가운데의 우물 물가에는

농녀(農女)의 그림자가 아직 있어라.


달빛은 그무리며 넓은 우주(宇宙)에

잃어졌다 나오는 푸른 별이요.

식새리의 울음의 넘는 곡조(曲調)요.

아아 기쁨 가득한 여름 밤이여.


삼간집에 불붙는 젊은 목숨의

정열(情熱)에 목맺히는 우리 청춘(靑春)은

서늘한 여름 밤 잎새 아래의

희미한 달빛 속에 나부끼어라.


한때의 자랑 많은 우리들이여

농촌(農村)에서 지나는 여름보다도

여름의 달밤보다 더 좋은 것이

인간(人間)에 이 세상에 다시 있으랴.


조그만 괴로움도 내어버리고

고요한 가운데서 귀기울이며

흰달의 금물결에 노(櫓)를 저어라

푸른 밤의 하늘로 목을 놓아라.


아아 찬양(讚揚)하여라 좋은 한때를

흘러가는 목숨을 많은 행복(幸福)을.

여름의 어스레한 달밤 속에서

꿈같은 즐거움의 눈물 흘러라.

새만금 내부 습지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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