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소중했던 것들 - 이기주

2020.7.13

by 박모니카

보랏빛 커버의 ‘언어의 온도’와 주홍빛 커버의 ‘글의 품격’이 책꽂이에 있다.

독서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하는 시대일지라도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는 단본 독서량에 최고치를 찍지 않았나 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나도 역시 이 책을 읽고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이라는 언어의 온도를 측정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토대로 살아가는 나의 삶이 얼마나 따뜻함과 차가움을 조화롭게 교류시키는지를 매일 고민한다. 얼마 전 중고서점에 갔다가 이기주 산문집 이라는 타이틀 하나만 보고 냉큼 집어온 책이 바로 ‘한 때 소중한 것 들 ’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꽃이 영원히 피어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지, 첫 문장)


- 우리 안에 머물다가 자취를 감추는 것들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 속으로 멀어지면서 무언가를 휙 던져주고 떠나간다. 이별의 대상은 한때 내 일부였으므로 내게서 무언가를 도려내 달아나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겨우 깨닫는다. 시작되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들과 내 곁을 맴돌다 사라진 사람들이 실은 여전히 내 삶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


- 무릇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먼 곳으로 떠나간다. 그러므로 서로가 세월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저네, 모든 추억이 까마득해지기 전에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부단히 읽고 헤아려야 한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하다. 우린 늘 다시 시작 할 수 있다.(책을 건네며)-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 추스르다

- 사랑을 표현하고 상처를 감지하는 일

- 자전거 타는 법과 인생의 차이

- 선택과 이유

- 사람 마음엔 나무가 자란다

- 다른 사람의 정원에 핀 꽃

외 16편


2부, 건네주다

- 감정과 생각의 총합

-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 부모의 마음에서 눈덩이처럼 굴려지는 것

- 오만과 편견

- 침묵과 말 사이

외 14편


3부, 떠나보내다

- 이분법의 감옥

- 거울

- 점묘화

- 정말 아름다운 것의 속성

- 어둠을 매만지는 일

외 14편


제 1부, 추스르다

세월 앞에서 우린 속절없고 삶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다만 내 아픔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꽤 짙고 어두운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자전거 타는 법과 인생의 차이 <P.70 - P.74>


- 순수와 열정, 청춘과 젊음처럼 뜨겁고도 투명한 단어들은 ‘아니 듦’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일이다. 스스로 터득한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일이다. 삶이라는 비바람 속에서 한때 내 일부였던 것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수분을 잃고 가루가 돼 흩날리는 광경을 덤덤하게 바라보면서, 우린 그렇게 나이라는 것을 먹는다. -


- 어린 시절엔 나이 먹는 것이 자전거 타는 법과 엇비슷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몇 번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삶의 페달을 밟으면,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살면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 쉽게 잊히지 않듯이, 자전거 타는 법도 한번 배우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


-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의 민낯을 알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의 모든 게 익숙해지거나 나아지는 것을 아니다.


팍팍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일은 자전거 타는 일과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다. 그저 우린 삶의 번민과 슬픔을 가슴에 적당히 절여둔 채 살아온 날들을 추진력 삼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각자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삶의 페달을 밝아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 -


제 2부, 건네주다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하고만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특히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방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일이다.


오만과 편견 <P.129>

- 오만이라는 빗장으로 잠겨진 마음의 문은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문이다. 어떤 열쇠를 꽂아도 그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또한, 편견이라는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지은 마음의 집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도 날카로운 집이다 -


꼭 가야만 하는 길 <P.146-147>

- 앞에서 오는 돌을 맞으면 ‘운명’이고 뒤에서 오는 돌을 맞으면 ‘숙명’ 이라는 말이 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가슴에 사연 하나 품은 채 삶의 무게를 견디다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갈래의 길을 걸어야 한다. -


침묵과 말 사이 <P.156-157>

- 영어단어 'silent'는 ‘listen'과 배열이 다를 뿐 철자가 동일하다. 타인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선 입을 닫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잘 말하기 위해선 상대의 가습에서 드밀고 올라오는 것들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들끓고 있는지, 미소 뒤에 얼마나 슬픈 비명이 감춰져 있는지 헤아려야 한다. -


제 3부, 떠나보내다

소중한 사람이나 존재는 우리 곁을 떠날 때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소중한 무언가를 내게 남겨둔 채 떠나거나 내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떼어내 가져간다.


이분법의 감옥 <P.199-200>

- 어쩌면 우린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스스로 지어올린 감옥에 갇히는 존재인지 모른다. 편견의 감고, 자기혐오의 감옥, 두려움의 감옥처럼 그 유형도 다양할 것이다. 그중 가장 경비가 삼엄해서 탈출하기 어려운 감옥은 ‘세상의 모든 것은 희거나 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간주하는 이분법의 감옥이 아닐까 싶다. -


어둠을 매만지는 일 <P.209-210>

- 끄트머리, 라는 단어에는 끝이 되는 부분이라는 뜻 말고도 일의 실마리,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끔은 과거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생각과 감정의 속살을 직시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거나, 답이 없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희망은 양지와 시작과 미래가 아니라 음지와 끝과 과거에서 생겨난다. -


거울 <P.217-220>

-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 영어로 거울을 뜻하는 ‘mirror'는 어원적으로 ’보다‘ ’놀라다‘ ’당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하긴 옛날에는 구리나 돌을 매끄럽게 갈아서 거울을 만들었을 텐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는 것을 넘어 화들짝 놀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걸까?‘ 하는 물음이 우리 안에서 올라오기 마련이다. -


- 무릇 사람이란,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받아야만 삶을 견딜 수 잇는 존재가 아니던가. 특히 ‘용서’라는 비좁은 의자에 남이 아닌 나와 함께 앉을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안온한 상태로 접어든다. 마음이 쉼을 얻는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며시 남겨본다. 손예진과 정우성이 주연한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흐른다.

“용서는 어려운 게 아니야. 용서는 그냥 미움한테 방 한 칸 내어주면 되는 거야.....” -


위 구절의 거울을 읽으며 용서라는 말을 되새길 쯤, 고 박원순 시장의 소식이 들려왔다. 밤새 뒤척이며, 뉴스를 끄고 있다가 새벽 4시경 눈이 떠졌다. 소식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적어도 내게 충격의 경중은 다를 바 없었다. 노무현대통령, 세월호사건, 최근 노회찬의원, 그리고 박원순시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언제쯤 미움한테 방을 한 칸 내어주는 용서를 알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되어야 한 인간과 한 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이 전체를 뒤집어버리는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오늘도 비가 온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장맛비 속에 내리 쬘 따뜻한 햇살이 용서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앉는 하루가 매일이었으면 좋겠다.

이기주산문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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