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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봄날아침편지161

2024.9.26 박영근 <가을비> / <길>

by 박모니카

‘늙어간다는 것‘ 가까이 복실이에게서 매일 느끼는데요. 커다란 혹들을 달고, 처벅 처벅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지팡이를 든 노인의 발걸음 같아서 안쓰러웠어요. 제가 할 일은 안아주는 것보다, 기다려주는 일이 더 마땅하다 생각했지요. 대소변을 뜻하지 않은 곳에 놓아도 화를 내지 않구요. 제 손 한번 더 쓰면서 한마디 더 합니다. “복실아, 여기에 오줌싸는 거야...”


새벽잠이 없기로는 복실이도 비슷한지, 어슬렁거리며 나와서 저를 바라보는 쪽으로 다시 눕고 코를 고는군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하단에 놓여있다고 하지요. 이 주줏돌이 빠지면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맛있다는 음식도 나만 먹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줘야지 하는 맘으로 잠자는 복실이를 쓰다듬어주네요.


지난 5주동안 석전 박한영, 만해 한용운, 가람 이병기, 석정 신석정을 비롯한 많은 근대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전주 강연이 오늘 끝납니다. 제가 이 나이에 특별한 시공부를 위해서 열심히 경청한 것이 아니고요, 그냥 ’듣고 싶어서 들었던 강의‘였습니다. 저는 아무리 들어도 말로 표현을 잘 하지 못하여, 소위 ’잘 난체병‘은 걸리지 않으니 이 또한 고맙지요. 단지 알지 못했던 사실 또는 허구일지라도 옛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하고, 미래에도 특효제가 될 거라 생각하면서, 제 맘에 드는 말들은 가슴 속 깊이 새겨놓는 답니다.


얼마 전 지인이 부안출생 박영근 시인(1958-2006)의 시<길>을 들려주었죠. 궁금하여 검색하니 박노해, 백무산 등, 민중시인들의 대부 격, 최초의 노동자시인, 노동문학의 꽃은 피운 시인... 이런 표현이 많았습니다. 저만 몰랐지, 아주 유명한 시인이네요. 특히 가수 안치환의 노래로 유명한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자이고요. 박영근 시인의 <가을비>와 <길>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가을비 - 박영근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자장면 그릇 몇개

서로 얼굴을 파묻고

비에 젖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빈 그릇 속으로 고이는 빗방울들

지나가던 행려의 사내 하나 그 모양을 보고 있다

어디 먼 데

먼 데로

흩어진 식구들 생각을 하나보다


플라타너스가 젖고

빗속으로 가지들이 흔들리고

허공에 걸리는 새 울음소리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낮게 엎드린다

온통 젖은 얼굴 한장

흙탕물 튀어오르는 그릇 위로 떨어지고 있다


날이 더 저물면 한번쯤 우렛소리가 건너올 것이다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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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안준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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