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2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출판사의 대명사,’창비‘. 그 중 창비시선이 500회 기념집을 냈길래 읽는 중입니다. 창비가 시집을 내기 시작한 지도 50여 년이라네요. 출판사의 의지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이어주고 있는 시인들, 그리고 창비시선을 사랑하는 독자들... 말 그대로 삼위일체의 아름다운 조합이예요.
제가 글쓰기를 몰랐을 때에도 유명출판사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요. 책방을 차리고나서 책을 주문할 때마다 유심히 보는 것 중 하나가 출판사예요. 얼마 전 통계자료에 8만여 출판사가 등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책 1권이라도 낸 출판사는 10% 정도라고 하더군요. 요즘 한강작가의 수상소식으로 출판사의 이름도 덩달아 오르내리는데요. 한 작가의 책이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뉴스에 당연하다 라며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제가 책방이름과 함께 쓰고 있는 출판사 ’봄날의 산책‘... 얼마만큼의 역사(?)를 가지고 갈까...를 생각해보기도 했네요. 누구나 책을 쓰는 세상이라서 그런지 책 만들기를 쉽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건 단순히 책을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출판까지의 과정을 생각할 일이 별로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제가 직접 해보니, 정말 쉬운 것은 없어요.
작가가 준 원고가 완벽하다고 장담할지라도 책 출판까지는 더없이 긴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거든요. 항상 글쓰는 작가들과 책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책이었는데, 어제 창비시선집 50년의 역사를 보면서 새삼 출판사의 지고지난한 역사를 떠올려봤답니다. 그들의 수고에 보답하는 일, 첫째는 ’책을 읽는 일‘이겠죠. 오늘도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한 장이라도 보면서 출판사의 수고에도 고맙다 라고 소곤거리시길... ^^
류시화시인의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사진제공, 박세원 문우(제주도 산방산과 주변 풍경을 보내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