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25 윤성택 <주유소>
학생들도 방학이 끝나간다고 심드렁한숨, 저는 새학기가 다가온다고 걱정한숨...
“얘들아, 1분만 집중해봐. 영어 말고 시 하나 읽어줄게 제목 맞춰봐. 선물있어”
“시는 어려운데요. 영어문제나 풀께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퀴즈처럼 시를 들려주었죠. 이틀전 아침 편지시 이성부 시인의 <봄>. 좋은 시라서 하루종일 웅얼거리고 다녔거든요.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중략)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중략)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먼 데서 이기고 들아온 사람아
제 학생들의 감수성은 끝내주었죠.. 저의 낭독이 끝나자마자 튕겨나온 대답소리 ‘봄’이요.
얼마나 이쁘던지요. 교육자의 재미는 바로 이런 건가 봅니다. 학생들도 제 스스로 신기해하고요. 자기가 바로 시인이라나요?^^ 아마 그 학생은 기타를 매우 잘치는 학생이라 좀 남다른 감수성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봄이 오니 공부할때마다 5분만 시간내어 시 제목 퀴즈를 내겠다 했더니,,, ‘으으으 으악’ 하더군요. 귀여운 것들!!
제가 공공연히 말하는 활동 중 하나, ‘시나눔책방’인데요, 시시때때로 이렇게 우리 학생들에게만 들려주어도 엄청난 홍보대사가 되겠지요. 이런 운동에 슬며시 들어온 ‘시삼백 사무사’필사팀 회원들의 열정이 멋지지요. 매일 새로운 시들이 올라와서, 저야말로 저절로 귀한 선물을 받고 있답니다. 특히 처음 본 시와 시인들의 작품을 읽게되면 땅 속 깊이 묻혀져 있던 원석을 만난 듯 하고요. 오늘도 좋은시 하나 들려드립니다. 윤성택시인의 <주유소>입니다. 오늘의 논어구절은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다-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주유소 -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사진 지인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