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44

2025.6.1 정양 <내 살던 뒤안에>

by 박모니카

오월의 끝자락에서 불쑥 올라온 유월의 햇살. 김영랑시인은 이 햇살을 두고 돌담에 속삭인다고 했는데, 어디 돌담에게만 정을 주면 얼마나 속 상할 이가 많겠어요. 저만 해도 그 속삭임 받고 눈을 떠서 새 달의 새벽 기운을 마십니다. 동시에 어느 시인의 부고를 접하면서 그분이 누군가 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네요. 정양(83세, 전북 김제 출신) 시인이 어젯밤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올라왔거든요.

얼마 전 한 문우께서 시집 한 권을 신청하셨는데, 정양시인의 <암시랑토 앙케, 2023>였는데요. 시집만 팔았지 막상 저는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단지 시집의 제목이 진한 전라도 사투리여서 메모만 해 놓았었는데, 어젯밤에야 그분의 시 몇 편과 그분의 활동자료들을 읽어보았네요. 제일 가난했던 시절의 사람 얘기를 민화적으로 투박하게 그려진 작품이라 합니다. 특히 전북 방언을 과감히 활용해 토속적이고 구술적인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의 영지를 확장했다는 평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북이야기를 많이 쓴 대표시인, 김용택, 안도현 같은 시인들과 함께 ‘모악출판사’를 만들었고, 전북작가회의를 창설, 사회 참여적인 문학활동을 많이 주도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출판사의 대표작품 <김사인 함께 읽기>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 등의 책을 좋아해서 책방손님들에게 많이 권하고 있거든요.


정양시인의 명복을 빌며, 지인께서 올려주신 그분의 시 <내 살던 뒤안에> <봄> <봄비> <이마를 짚고> <쇠비름풀> <토막말> <화학선생님> <참숯> 등을 함께 읽어보아요. 작년에는 이분의 문학사적 자취를 조명하는 세미나도 있었는데, 지금 같으면 그런 정보를 알았더라면 달려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지금부터라도 전북 문단의 원로 시인들의 발자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 세계를 다양하게 공부해야겠다 싶습니다. 그분의 시 중 <내 살던 뒤안에>를 들려드립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내 살던 뒤안에 - 정양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어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 감는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는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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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임. 김영춘시인의 애도사>


정양시인이 떠나셨습니다. 특별히 드러내지 않고 사셨으니 우리 식구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은 분입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라진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우리곁에 있었던 선배이자 형님이자 어른입니다. 이 지역의 쓸만한 글쟁 이들을 모두 그양반이 멀찌감치서 바라보았습니다.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으니 떠나시기에 때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아셨든 모르셨든 그양반의 시와 인생과 영혼을 함께 배웅하고 싶습니다.

이제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어린애 였다는 것을 오늘 다시 압니다. 요즈음의 모든 논처럼 우리 고향집 논에서 개구리만 웁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개구리만 웁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531221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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