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63

2025.6.20 안도현 <삶은 감자>

by 박모니카

비가 오는 금요일... 왠지 마음이 단정해지는 시간. 갑자기 외할머니의 손길 하나가 생각나네요. 쪽빗으로 머리칼을 빗어넘기고 거울을 보시던 모습이요. 고향 섬 길을 따라 우물가에서 동이에 물을 싣던 할머니. 자그마한 그녀의 뒷태를 보며 걸었던 어린 제가 이 시간에 문득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아마도 그런 날에도 비가 왔었을까요. 사람의 기억 중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의식 창고에 덩쿨되어 숨어있다가 나타날 테니... 하여튼 비가 오니 마음이 편합니다.


어제 편지에 감자알을 걱정했더니, 지인들이 더 걱정하셨나 봐요. 어서 빨리 캐라고, 작은 알 먹고 장맛비에 상하게 하지 말라고 채근하는 목소리에 밭에 갔었죠. 우렁각시처럼, 저 몰래 제가 심어 놓은 작물들을 잘 농사짓는 남편 덕분에 저는 꽃 사진만 찍고 다니는데... 남편은 비가 와도 괜찮다고, 분명 우리 감자는 잘 자라고 있다고 안심시켰지요. 이왕 나선 길, 다른 작물도 보고, 비에 흔들거릴 지지대도 더 깊이 박고 할 참으로 아침 소풍 갔어요.


‘감자알이 얼마나 맺혔을까. 한 뿌리에 십 여개만 달렸어도 완전 대박인데...’ 하며 둘러보니, 아직 제 감자잎은 푸름이 청청하더군요. 잎이 다 시들고, 옆으로 완전히 누워버리면서 제 영양분을 알들에게 다 준 잎사귀를 만나야 감자수확 제철이라는 제 나름의 상식이 있는데요. 그럼에도 비가 오기 전 한 알이라도 만나보고 싶었지요. 한 뿌리를 잡아 올려보니 그래도 먹을만한 크기의 감자알 대여섯 개가 딸려 나오더군요. 권태웅시인의 <감자꽃> 시 따라 하얀 꽃이 핀 감자는 하얀 감자로 나왔답니다. 선생님들 간식으로 찐 감자를 생각하며, 딱 두 뿌리만 캤네요. 그 사이 자란 호박 오이들을 챙겨, 학원일로 고생하시는 샘들의 몫도 챙기고요. 오랜만에 메밀막국수와 전병을 먹으며 초로의 부부는 아침산책을 했답니다.


요즘은 매일 일만 하는 것 같아요. 전주에서 열리는 시인 특강에도 갈 수 없을 만큼, 학원일로 ‘콕콕‘ 하는 일상이네요. 하짐만 오늘은 비도 오고 하니 호박전 부침이나 해서 나눠야겠어요. 여름작물은 그때그때 나눠야지, 그래야 작물들도 기뻐할 테니까요. 감자에 관한 시 중, 저는 안도현 시인의 이 시를 좋아해서 감자철마다 꼭 올려드리는 것 같군요. <삶은 감자>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삶은 감자 – 안도현


삶은 감자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머리 깨끗이 깎고 입대하는 신병들 같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중이다

감자는 속속들이 익으려고 결심했다

으깨질 때 파열음을 내지 않으려고

찜통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익었다

젓가락이 찌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내주고, 김치가 머리에 얹히면

빨간 모자처럼 덮어쓸 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입에 넣고 씹어만 봐라

삶은 감자는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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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슬포슬 담백하다고, 엄지척 해주신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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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옆 텃밭지기, 가경이네 상추는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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