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유독 산들바람이란 말이 떠올랐다. 산들바람의 사전적 의미는 보통 ‘시원하고 부드럽게 부는 바람’ 정도로 써있다. 바람의 종류 중에 계절마다 다른 세기와 빠르기를 가진 계절풍이 있다. 순 우리말로 철바람이라고 불리니, 봄바람 여름바람 가을바람 겨울바람 이겠지. 사계절로 나누어서 바람을 부른다면 달을 기준으로 바람을 불러보면 좋겠다 싶었다. 그중에서 4월의 바람이름 자리엔 꼭 산들바람이 차지했으면 좋겠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텃밭에도 산들바람이 찾아왔다. 지긋히 눈을 감고 함께 온 향기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엄마나무를 떠나온 벚꽃향기, 숙성되고 있는 퇴비향, 심어지길 기다리는 고추모종 오이모종들의 풋풋한 새싹에서 나오는 박하향도 있었다. 같은 사물이라도 바람이 없는 닫힌 공간에서 나오는 향기는 무겁고 쾌쾌한 냄새이다. 바람, 특히 산들바람은 그 어떤 냄새도 향기로 바꿔 놓는다. 과연 4월바람은 하늘이 주신 천연향기 교환장치이다.
어느새 서로를 노인네 취급해도 서운치 않고, 느린 동작도 기꺼이 감사하며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는 우리 부부는 이틀전 텃밭에 덮은 비닐을 생각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당분간 비 올 낌새가 없어서 비온 뒤 고추모종을 심자는 생각을 앞당기기로 했다. 그래봤자 남들보다 일주일 정도 빨리 심는 거라며, 그사이 새벽 냉기로 고추가 죽을 일은 없을거라고 남편이 말했다. 항상 어떤 일의 과정을 보면 지극히 마땅한 결과를 가져오는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나에 삼백원짜리 고추모 70여개와 오백원짜리 가시오이 모종을 5개 사서 텃밭으로 향했다.
모종을 사러 시장에 갈때도 따라오더니, 텃밭으로 안내하는 아침 산들바람은 나의 모종심기 행사를 열렬히 환영했다. 두둑의 비닐은 대롱거리는 물방울이 가득한 온실천장이었다. 일정하고 적당한 습도와 온도로 새 생명을 싹틔울 인큐베이터. 모종을 심고 싶어서 갑자기 손과 발이 빨라졌다.
작년에 잦은 비로 고추농사는 패망했다. 더불어 고추심기에 적당한 간격과 위치를 배웠다. 욕심내지 말고 널찍히 거리를 두고 고추모종을 심으면서 갑자기 코로나로 사람이 두는 거리간격이 떠올랐다. ”얘네들도 거리가 가까우면 코로나에 걸리지. 바로 탄저병이 코로나지.“ 라고 말하니 ”울 각시는 언제나 소녀 같아.“라고 남편이 응수했다.
텃밭을 만난지 4년차 농부로서 무엇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할 것이 있다. 바로 ‘자연의 얼굴‘이다. 그 속에는 식물의 얼굴이 있고, 애기 모습인 모종의 얼굴도 있다. 또 모종을 만들어준 씨앗의 얼굴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을 키워주는 땅의 얼굴, 햇빛의 얼굴, 바람의 얼굴, 비의 얼굴, 구름의 얼굴도 있다.
텃밭을 일구기 전에는 사람에게서만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삶의 공간을 살짝 다른 곳으로 열어보니 얼굴을 가진 것이 사람만은 아니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얼굴이 있었다. 그 중 식물의 얼굴을 볼줄 알게 되고 그들과 얘기하는 나를 보노라면 아마도 하느님이 분명 나를 사랑하는게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모종들을 심고 난 후 그들의 뿌리 깊숙이 물을 주고, 둥그렇게 여벌의 흙을 덮어주었다.
이를 본 남편은 ”당신 진짜 농부 다 되었네. 말 안해도 알아서 흙까지 덮는 걸보니.“ 라고 말했다.
”아마도 사람은 태고적부터 농사법을 알도록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나봐. 내가 봐도 신기하지. 심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고 심고 나면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여.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도 명색이 농사꾼 3년을 넘겼잖아요. 풍월을 읊고도 남아야 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일부러 촌길을 돌아온다. 청보리싹 알이 하루가 다르게 푸짐하다. 이 때쯤이면 알찬 간장게장이 생각나고,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이란 시도 생각나는데 보리에도 알이 가득차네. 조만간 이 보리알들도 제 생명의 가치를 봐달라고 소리치겠지. 초록잎이 푸른 파도처럼 넘실대는 보리밭에서 누군가 가곡 ’보리밭‘을 부를 수도 있겠지.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흥얼거리는 내 맘의 소리를 들었는지, 산들바람이 나를 감쌌다.
”오늘 이 바람이 참 좋네. 진짜 부드러워. 당신도 팔 한번 내밀어봐.“
”당신이 좋다니, 나도 좋네. 그런데 몇 년전 첫 번째 뇌졸중 진단을 받았을 때 이 바람을 느끼지 못했네. 운전을 하면서 일부러 팔을 내밀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 바로 툭하고 바람이 내 팔을 떨어트렸지. 지금 이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지.“
그랬구나. 그때 남편의 팔을 이 바람이 밀어버렸었구나. 아무 생각없이 내게 안기는 이 바람이 좋다고 당신도 느껴봐 라고 재촉했는데, 그의 마음에는 이런 아픔과 두려움이 있었구나.
운전하는 남편의 옆얼굴을 바라보니 괜시리 코끝이 찡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돌아가는 곡선의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남편, 느리더라도 좋은 사람과는 꼭 같이 가자는 남편이다.
나를 따라오는 산들바람은 이제 내 바램을 듣고 있겠지.
’바람아 바람아, 이왕이면 오~~랫동안 내 짝궁에게 너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게 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