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야, 수고했다는 말도 못했네

2020.7.20 텃밭이야기 12화

by 박모니카

주말내내 하늘이 무겁더니 바람 역시 습하고 눅눅했다. 에어콘을 켜는 사무실에 있다가 잠시 밖을 나가니 분명 큰 비가 올 듯한 바람냄새에 텃밭애들이 생각났다. 이삼일간 햇빛을 듬뿍 먹었을 옥수수를 얼마라도 거두어야 되겠다 싶어서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드님, 그대가 심었던 옥수수, 수확하러 가세나. 제 손으로 심은거 제 손으로 수확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네."

"아, 그 옥수수. 좋죠. 준비물은요?"

"옥수수 담을 바구니, 그리고 피아노 선율."


여름작물로 감자를 수확해서 지인들에게 판매한 뒤, 함께 동거했던 옥수수의 수확을 기다리는 내 맘을 알기라도 하듯 옥수수 줄기 기세는 하루가 달랐다. 어느날 옥수수를 검색하니, 저 멀리 안데스 산맥이 발원지라는데 어찌하여 내 손까지 오게 되는 인연이 되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보는 이삭은 보통 암이삭으로 줄기에 3-4개가 열리고 수 이삭은 줄기 끝에 하나가 열린다고 했다.


옥수수를 모종으로 20개를 심고 10여일 후 씨앗으로 80여알을 심었었다. 모종으로 심은 것 들은 감자들에게 자리를 뒤치지 않고 모두 안착했지만, 씨앗으로 심은 것들은 영양분을 모두 빼앗겼는지 30여 대의 줄기만 올라왔다. 노란색과 보라색, 그리고 혼합색을 골고루 심었는데 보라색 옥수수가 생명력이 더 강한건지, 눈에 보이는 것은 자색옥수수가 더 많았다.


도심에서의 눅눅한 바람도 산골로 들어오면 청청해진다. 7월 들어와 시작된 장마비와 햇빛의 격자무늬 속에서 텃밭의 작물들은 뽐내기 바빴다. 내 텃밭만 해도 갈때마다 오이와 가지가 풍년이고, 지금은 대추토마토가 주렁주렁 붉은 빛을 발산한다. 호박줄기따라 만들어진 장벽 틈마다 어린 호박들이 땡글거리고, 단단한 고추대들의 힘을 입어 고추들도 제 모양이 실하다.


아이들과 함께 옥수수 밭에 가는데, 벌써 대준씨네 옥수수는 줄기 대만 덩그런히 쓰러져 있었다. 언제 와서 옥수수를 따고 말끔히 정리해 좋았는지 부지런도 하다 생각했다. 대준씨네는 옥수수를 몇개나 얻었을까 궁금해하면서 내 옥수수 밭으로 갔다.


"엄마, 어떤 거가 익은 거예요? 겉보기에는 모르겠는데요. 모두 통통해요."

"내가 듣기로는 옥수수 수염이 진한 갈색이 되고 고개를 완전히 숙인 애들이 다 익은 거랬어. 겉 피부 색도 좀더 진한 초록이 더 잘 익은게 아닐까? 나도 초보잖아. 일단 옥수수 수염 색깔을 보고 만져봐서 통통하고 단단한 거면 따도 될 것 같아."


옥수수 줄기 한 대당 서너개의 옥수수가 달려 있었다. 해가 뉘엇뉘엇 거려서 마음이 바빠지니 손에 잡히는 대로 옥수수를 땄다. 온몸을 다해 곧은 자세로 서 있던 옥수수 하나를 이 뭉툭한 손으로 툭 꺽으니 왠지 갑작스럽게 아픔이 밀려왔다.


'아고야, 세상에. 그동안 수고 했다고 말 한마디 안하고 생채기를 시키는구나. 미안하고 미안하다.'

둘러보니 아들 딸은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꺾는데 욕심 많은 나만 생각없이 미련스럽게 옥수수를 가져가기 바빴던 것이다. 잠시 미안한 마음을 추스리고, 하나씩 딸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했다.

얼마전에 읽은 작가 '다니카와슌타로'의 글 <사과에 대한 고집>을 빌어서.


"하느님이 땅과 물과 햇빛을 주고, 땅과 물과 햇빛이 옥수수줄기를 주고, 그 줄기가 노랗고 빨갛게 익은 옥수수 열매를 주고 그 옥수수를 당신이 나에게 주었다. 부드러운 두 손으로 감싸서 마치 세계의 기원 같은 아침 햇살과 함께"


늦게 씨앗으로 심었던 자색 옥수수 한 두렁을 남기고 거둔 옥수수는 45개.

옥수수 첫 수확금 역시 기부용도로 맘을 쓴터라, 12개씩 3 묶음을 지인 3명에게 팔았다.

지인 중의 한 분이 바로 친정엄마인데, 아침에 옥수수를 쪄보니 튼실하니 잘 여물었다고 전화를 주셨다. 또 싱싱할 때 바로 쪄서 먹어야 맛있다고, 소금기와 단 맛을 내어서 팔팔 삶다가, 약한 불에 얼마만큼 익히면 된다고도 하셨다.


아침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집으로 들어간 참에 옥수수가 눈에 띄었다. 큰 것만 골라 팔으니, 남은 것은 조금 작고 약간 벌레 먹은 것도 있었다. 한겹 한겹 껍질을 벗길 때도 미묘했고, 깊숙히 옥수수 알을 덮고 있던 옥수수 수염을 뜯어 낼 때도 미묘했다.


해마다 남이 쪄 준 옥수수만 먹다가 '아, 옥수수 하나 먹는데도 이런 순서가 필요했구나. 수고롭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네. 이 나이를 먹도록 편히 살았구나.'라는 반성을 뚝뚝뚝 떨어트리며 옥수수를 냄비에 얹혔다.

갓 쪄서 나온 옥수수는 정말로 맛있었다. 옥수수 모종을 사주며 '잘 키워보세요' 라고 했던 로사가 생각나서 알록달록 통통한 것 5개를 골라서 짐 내어놓고, 혼자서 하모니카 불 듯 옥수수를 불었다.


아침 진로코칭 수업때 학생들이 물어봤던 얘기가 떠올랐다.

"선생님 이름이 진짜 모니카예요? 진짜 직업은 뭐예요? 혹시 음악선생님 아니예요. 하모니카 잘부는."


옥수수를 먹으며, 어떤 시인이 옥수수에 대해서 멋진 시를 썼을까 하고 검색해보니 많은 시인들이 옥수수를 예찬했다. 그 중에서 황상순 시인의 <옥수수를 기다리며>라는 시가 맘에 들어서 혼자서 낭송해 보았다.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고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꺽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를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 진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든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나도 역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옥수수를 잘뚝 잘랐던 어제가 생각나서 배시시 웃었다.

옥수수를 찔 때 수염자락을 훌쳐매고 무정하게 잡아당겨서 얼마나 아팠을꼬 하니 미안해서 혼자 또 웃었다.

갓 지은 옥수수를 도둑밥처럼 몰래 먹은 것 같아서 잠시 뒤 들어온 남편에게 먹다만 옥수수를 내밀면서 다시한번 웃었다.


이제 남은 자색 옥수수를 딸 때는꼭 말해야지.

"이렇게 잘 커주어서 고맙고 고마워요. 그대를 담고 있던 몸줄기랑 떨어질 때 덜 아프도록 부드럽게 할께요. 이별을 너무 서러워 마세요. 우리 또 만날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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