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9.17 안상학 <얼굴>
”원장님, 혹시 명심보감 이란 책 아세요?”
”헐, 네가 그 책 이름을 어떻게 알아? 신기하네. “
”그 책 깜지 쓰는 책 아니에요? 마음을 밝혀주는 책인데요. “
알고 보니, 학생이 초등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말썽꾸러기 학생들에게 깜지에 쓸 내용으로 사용했던 책이 ‘명심보감’이었습니다. ‘아니, 이런 멋진 선생님이 있었단 말이야? 그분 만나고 싶다’라고 말하며 학생과 한참을 웃었습니다. 학교 밖 활동으로 축구를 하는 중학생인데요, 아무리 늦어도 학원에 옵니다. 단 30분이라도 영어공부 하고 간다고요.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1년 가까이 가르쳐도 ‘boy and girl’도 구별 못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천지개벽한 듯, 제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고, 지금은 소위 ‘현재완료시제’라는 용어도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 학생이 명심보감까지 말하니, 얼마나 기특했겠어요... 바로 부모님께 이 별난 일을 톡으로 보냈더니, 오히려 제게 감사하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저녁에 찾아온 후배와의 대화에서, <논어> 필사에 이어 <명심보감> 필사를 시작해 볼까?라는 말을 했는데, 그때 저희들의 대화가 그 학생의 귀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지요.^^ 어찌 됐든 제가 하는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작으나마 파동이 되어 즐거움을 준 것 같아서 기분 좋았네요.
오늘도 전주에서 안상학 시인과의 만남이 있고요, 핑계김에 시인의 시 몇 편을 읽어보았지요. 읽다가 좋은 시는 문우들에게 권독 했고요. 디카시집에 실린 시도 몇 편 읽어보면서 차후의 여러 계획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오늘도 중간중간 비 소식이 있는데, 일교차가 급격히 벌어지고 있군요. 똑같이 걸어도 땀방울이 덜 보이는 걸 보면, 확실히 쌀쌀한 가을날입니다. 때론 답답하다 싶다가도, 그래도 미련 많은 인연이 정스러운 법인데, 야멸차게 휘돌아가며 나무들을 벗기도, 풀들을 메마르게 하는 가을기운을 보면 왠지 마음이...
이럴 때 가장 좋은 보금자리방석은 바로 시 읽고 글쓰기입니다. 오늘 다른 광고하나 할까요. 지금 군산시 평생학습관에서 ‘온택트로 만나는 프로그램’들이 접수 중인데요, 제가 진행하는 ‘근대시인 시 읽기와 글쓰기’도 정원에 다다랗더군요. 이 가을 공부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으니, 기타 여러 프로그램을 만나셔서 배움의 즐거움을 누려보세요. 오늘은 안상학 시인의 <얼굴>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얼굴 - 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
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늘 그 얼굴에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
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
그저 별다른 얼굴 없다는 듯
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
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있는 나무의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