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240

2025.12.14 박남준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by 박모니카

밤새 겨울비는 내리고 골목길도 냉기에 오돌오돌 떨겠지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군산월명동 일대와 스무 살 청춘까지 살았던 바닷가 중동은 골목길이 많은 곳입니다. 새 책방 1주일 만에 처음으로 안내 책상에 앉아서 손님맞이를 했는데, 지인께서 오셔서 맛난 점심도 함께 먹고요, 오랜만에 만남의 회포도 풀었지요. 오후에는 창밖이 보이는 긴 의자에 앉아 군산이야기가 나오는 수필집, 편성희 작가의 <이런 날 너는>을 읽었습니다. 물론 다 읽지는 못하고, 월명동, 말랭이, 나운동 등의 동네 이름이 나오는 곳을 먼저 읽었네요.


- 골목을 돌아다니는 일은 지금을 씻어내는 일이다. 지금이 고달프거나 아련히 서글프거나 매운 일로 우울해지면 불현듯 그 길들이 생각난다. 한 편의 영화처럼 남아있는 동네, 외로웠지만 불행하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 한 동네를 다 돌면서 나만 볼 수 있는 필름을 돌려보면 갈 때마다 다시 힘을 얻어 돌아오곤 한다. 그 길에 빠져 걸으면 시간 안의 일들이 차곡차곡 떠올라 한때의 서럽던 일들마저 뜨거움으로 차오른다. 어둡게만 느껴졌던 어릴 적 차별된 나의 모습이 따뜻하게 다가오고 구석구석의 집들이 한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그때처럼 먼 시선으로 앉아 골목을 바라보게 된다. - (’ 그늘 맑은 어떤 날’ 중에서)

시집을 읽을 때도 단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곤 하는데요. 편성희 작가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제 마음을 토닥이는것 같아서, 다시 처음 목록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기껏해야 4년 살았던 말랭이 마을과 월명동 일대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는데요, 작가의 글을 통해서 제가 알지 못하는 현재가 아닌 저 건너편 마을의 옛 삶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의 습득도 있지만 독자의 마음 안에 묻혀있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던 어떤 슬픔이나 상처의 감정을 꺼내어 위로와 치유의 기쁨을 안겨주는 일도 하지요. 그런 면에서 작가님의 수필은 저의 마음에 구부러진 골목길을 따뜻한 눈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죠... 군산분들(특히 50대 이후)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새해에는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의 시간을 갖도록 할까 합니다.^^ 오늘은 박남준 시인의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을 들려드리고 싶네요. 봄날의 산책 모니카.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 박남준

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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