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 30분, 친정엄마의 전화벨이 울렸다. 굿모닝 벨은 수영장을 가자는 엄마의 전화로 시작한다. 여름의 길고 긴 날, 엄마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는 호되게 길지만 고생 끝이 낙이 온다는 속담처럼, 기쁨의 날개를 펼칠 때가 더 많다. 오늘은 수영장 대신 텃밭가서 일 좀 하자 하셨다. 아쿠야, 어제부터 시큰거리는 허리로 수영장도 가기 싫었는데 말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중년의 나이들어서 몸무게가 늘었다. 당신 표현에 의하면 오형제중 셋을 낳을 때까지만 해도 개미허리 같았다는데... 하지만 둘째 동생을 안고 찍은 흑백사진이 증거로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참 고운 우리 엄마, 아빠가 좋아했던 여배우 문희를 빰치는 미모였는데.
11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면서 오히려 몸무게가 더 늘었다. 첫째 이유는 무릎 수술로 움직임이 줄어들었고, 여러 잔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체중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의사들마다 체중을 줄여야 한다는 조언은 익히 알고 있지만 살을 뺀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상체가 큰 반면 하체가 약하다 보니, 걷기운동도 한계가 있었다.
음식량조절, 식단균형, 민간요법 등으로 다이어트를 수 십번 시도해 보았으나, 뜻대로 체중을 줄이지 못했다. 더불어 나 역시도 50살이 넘어가면서 영락없이 엄마 몸매를 닮아갔다. 목욕탕의 거울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엄마가 떠올라, 나 혼자서 흠칙 놀라기도 여러번 이었다.
결국 코로나 전 해부터 작심삼일로 시작한 것이 수영이었다. 다행히도 결혼전 익혔던 수영법이 몸에 남아있어서 물에서 뜨는 것이 재미있었고, 엄마 역시, 목욕탕 단골멤버답게, 물과 또 수영장의 아줌마들과 금방 친구가 되었다.
코로나가 있어도 꼭 수영으로 체중을 줄여보자고 의기투합했지만, 진짜 작심삼일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영장 물이 조금만 차가워도, 다음날 감기에 걸려서 못간다 했고, 사시사철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아님, 끈기가 부족한 것인지, 나는 엄마 핑계를 대고, 엄마는 내 핑계를 대며, 지속적인 수영을 하지 못했다.
7월 들어 다시 또 모녀의 다짐이 시작되었다.
“엄마, 이번에는 일주일에 최소 세 번 이상, 꼭 수영하시게요. 새벽에 엄마가 나만 깨워주면 나는 무조건 무조건이야~~. 그리고 ABC주스 잘 먹고 몸에 해독할 일을 만들어야 살이 빠질 것 같아.”
“너는 말은 잘 하지. 스스로 일어나서 에미를 깨울 생각을 해야지, 내 핑계나 대고. 하여튼 해보자. 큰일이다. 먹는 거 없이 살만 찌고. 어디가서 옷 하나도 제대로 못 사입고 그렇다.”
“엄마,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맨날 치렁치렁한 옷이나 입고 다니죠. 일 단계로 우리 3킬로 이상 빼면 서로 예쁜 옷 사입게요. 엄마 거 내가 사줄게요.”
그렇게 시작한 7월 수영이 3주차를 마감한다. 금주에도 세번을 갔다. 그런데 아침에 엄마의 전화벨이 수영인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텃밭으로 가자 하셨다. 다음 주에 있을 아빠의 11주기 제사에 쓸 고추랑, 호박도 따고 곧 올라올 태풍에 대비해서 고추대도 다시 세우자고 했다.
허리통증에 일어나기 싫은 맘은 꿀떡 같았지만, 수영장을 가는 날에는 도저히 짬을 낼수 없으니, 이러다가 아까운 작물들만 버리겠다 싶어서 남편을 깨웠다. 텃밭에 가자는 각시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 엄마랑 같이 간다고 하니, 우리 각시 추억거리하나 또 생기겄네 하며 뒤따라 나섰다.
이번 텃밭농사의 지금까지의 성적은 최고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6월에 완판한 하지감자 100여킬로 수확, 모종 5개에서 나온 오이 100여개에, 갈 때마다 가지에, 대파에, 방울토마토, 쌈채소류 등 빈손으로 온 적이 없다. 게다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오이 하나라도 모두 나눠 먹고 있으니, 얼마나 배가 부른가.
7월 들어서는 가장 눈에 띄는 작물은 고추와 고구마 순과 호박순이었다. 그 중 고추는 작년에 잦은 비로 탄저병이 돌아서 말 그대로 완전 패망했다. 올해는 작년을 반면교사 삼아서 모종을 심을 때부터, 간격 배치를 잘해서 통풍을 시원스럽게 했다. 또한 갈 때마다, 열매를 많이 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본이고, 퇴비와 물도 적절하게 투자했다.
그래서인지, 고추4종(외고추, 오이고추, 청양고추, 피망고추) 모두, 탐스럽게 열렸다. 가장 통통한 내 가운데 손가락보다 더 큰 것들이 가득찼다. 오늘은 고추 두둑사이에 앉아 고추 줄의 끝을 바라보니, 빨갛게 익은 고추가 족히 1근은 넘어 보였다. 태풍에 물러지기 전에 따서 생고추 넣고 고구마순 김치 담그자고 엄마가 말했다.
고추밭에 기어들어가서 왼쪽 오른쪽 번갈어가며, 고추를 따는데, 익지도 않은 고추에서 흘러나오는 매운냄새가 열기와 함께 진동했다. 갑자기 결혼 첫해, 시댁의 비닐하우스에서 시어머니가 고추를 따던 생각이 우르르 쏟아져서 잠시 눈물인지, 땀방울인지가 흘렀다. 내 남편이자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농사를 잘 지어 놓은 걸 보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아이고, 우리 며느리가 복 덩어리라, 고추가 대풍이네. 이 고추로 울 아가 맛난 음식 만들어 줘야겄다.”
라고 하셨던 생전의 말씀이 들려왔다.
엄마는 고구마 순을 오래된 순서대로 따며, 나머지 순들은 고구마 열매들 밑들 때 써야 한다고, 햇빛을 잘 받도록, 고구마순들의 머리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리고 한마디 하셨다.
“오메, 왠 모기들이 뭉든 안개 피어나듯 쏟아져 나온다냐. 모기가 사방에서 물어뜯는다.”
“엄마, 모기떼를 보고, 안개를 비유하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을걸요. 역시 엄마는 시인이야.”
“말만 하지 말고, 여기와서 얼른얼른 거두고. 김서방 땀 흘리며 일하는 거 미안도 안하냐. 그놈의 사진도 그만 찍고야.”라며 소리치며 혼을 냈다.
“저는 할 일 다 했어요. 아빠 제사에 쓸 고추는 제가 다 땄어요.”라고 답하니,
“어머니, 저는 오늘 참 행복합니다. 이렇게 어머니랑 각시가 같이 나와서 농사 진 거 담는 날이 평생에 몇 번이나 있겠어요, 어머니도 웃고, 각시든 더 웃고 하니까 농사 잘 지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