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7 입추에 고추수확하다
새벽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거렸다. 한쪽에선 가을이라고 우기는 입추가, 또 한쪽에선 아직도 여름이라고 울어대는 매미들 때문에 나의 시선도 오락가락 거리며 텃밭으로 갔다. 새벽 5 30분, 친정엄마의 전화.
“태풍이 세 개나 올라온단다. 빨리가서 고추 익은 것들 따오거라.”
기상예보 중 태풍 소식은 언제나 엄마에게 근심 일번지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직업이 배를 타는 일이어서, 어릴 때부터 비나 바람을 몰고 오는 태풍소식은 우리 형제들에게도 걱정근심 일타였다. 엄마의 한숨 소리에 우리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릇 소리하나 들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빠의 안전한 귀환을 기도했었다.
작년에 잦은 비로 고추에 탄저병이 돌아서 심었던 모종 100개를 모두 잃었다. 탄저병이 오기전에 농약을 쳐야 고추를 먹을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도 듣지 않고, 유기농 농산물 운운하면서 결국은 완전 패망한 고추농사였다. 올해 역시, 농약은 안돼 라며, 모종 심을 때부터 퇴비에, 고급 영양분에, 가지치기에, 고추대 세우기에 등등 최선을 다하는 남편의 노고를 믿었다.
지난 6월부터 서서히 선보인 고추들이 어찌나 통통하게 열매를 맺는지, 이대로만 간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다며, 잘 익은 푸른 고추들을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본격적으로 7월 중순부터 빨간고추들이 대롱거렸다. 푸른 바람과 따뜻한 햇빛이 텃밭에 상주하여 주인장 노릇을 하니, 심복인 우리들은 작물들의 하명만 기다렸다. 오늘은 바로 고추 대감이 부른 날이다.
두 두렁에 심겨진 고추 모종은 청양고추 20개, 외고추 50여개, 도합 70개였다. 두둑 사이에 들어가서 고추터널을 바라보니, 나무마다 고추들이 가득했다. 결혼 초에 시댁의 고추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따시던 시어머니와 같은 자세일까 싶은 모습으로 앉아서 한 개 한 개 고추를 땄다. 어떤 고추는 한번에 똑 하고 따지고, 어떤 것은 비틀어서 따니, 분명 쉽게 고추 따는 법도 있을거다 싶었다.
겉보기에는 쉽게 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어느새 두 시간여가 지나니, 온몸에 땀이 비오듯 하고, 도저히 무릎을 펼 수가 없어, 결국 엉덩이를 신발 삼아 기어서 나왔다. 열감지기가 있었더라면, 빨간고추의 캡싸이신 농도와, 내 땀의 용해도가 섞어져 아마 근처에 있던 불자동차가 달려왔을 거라고 말했다.
오늘의 수확물을 담을 채소상자를 마련해서 옥수수, 가지, 청고추, 홍고추, 오이 등을 담았다. 그사이 남편은 엄마에게 드릴 고추를 외고추와 청양고추로 나누어 담고, 진짜 태풍이 와도 괜찮을 만큼, 작물 들에게 단단한 지지대를 설치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삶의 지지대인 남편이 건강하게 나보다 더 오래 살기를 기도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화기가 돌아, 집에 오자마자 친물로 담금질을 했다. 그냥 서 있을 수 없어서 새들이 먹다 만 옥수수를 성한 알맹이만 까서 냉동실에 넣고, 밥에 섞어 먹자했다. 남편은 옥수수 이삭 7개의 알맹이를 모두 까 놓았다.
보통 옥수수 씨앗 한 개에서 나온 옥수수 대가 무려 내 키를 능가해 2-3미터 정도 자라고, 한 대 당 3-4개의 옥수수이삭이 열린다. 7개의 이삭에서 나온 옥수수 알을 보면서 다시한번 씨앗이 가진 엄청난 능력에 말문이 막혔다. 저 멀리 남 아메리카에서 전해온 이 옥수수가 어떻게 인간의 3대 주요식용작물이 되었는지, 이 옥수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인간은 지금의 풍요를 누릴 수가 없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신, 이거 바바. 기껏해야 올 4월에 옥수수 씨앗 100여개를 심었는데, 우리가 거둔 옥수수의 알이 도대체 몇 개야? 정말 신비롭다. 다 자연의 이치가 숨어 있는 거지. 싸우지 말고 나눠 먹으라는 이치. 사람끼리도, 동물한테도 말야.”
“우리 각시는 천상 소녀야. 그러니까 씨앗의 얼굴이라는 글을 썼지. 잘 보소. 옥수수씨앗에도 당신이 말하는 얼굴에 보이는지.”
고추와 옥수수를 정리하고, 빨래 한 통을 돌려서 널어놓고 나니 배가 고팠다.
“집에서 먹지 말고 나가서 대접 받읍시다.” “뭐든지 당신 좋을대로.”
김치찌개를 시켜먹고, 냉커피로 한담을 나누며, 고추와 다른 작물들 수확의 기쁨을 나눴다.
엄마집에 들어서서 자랑스럽게 고추를 펼쳐보였다. 이거는 외고추, 이것은 청양고추.
잘 씻어서 말려야 한다는 엄마와, 안 씻어도 되요 라고 하는 남편 사이에서 난 고추 사진만 찍었다. 농약치고, 흙이 묻었으니 씻어야 한다는 엄마 말에, 내가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이거는 농약 안 친 거예요. 농약을 쳐본 적이 없지. 그래서 작년에 탄저병으로 다 죽은거예요.”
“아니, 고추는 농약 안치는 사람이 없다는데, 약도 안치고 이렇게 실하다냐? 김서방이 고생했네. 고추들이 하도 성글거려서 농약도 준 줄 알았네. 잘 말려서 아껴 먹어야겄다.”
갑자기 엄마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딸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한 두 서번은 더 딸 거예요. 병만 안 퍼지면요. 엄마 진짜 이쁘지? 고추밭에서 이거 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니까요. 얼마나 이쁜지. 진짜 신났네요.”
김장용 고추로는 턱도 없겠지만, 이 이쁜 고추를 아껴가면서 먹고 싶다. 엄마가 만들어 줄 태양초 고춧가루를 올겨울 내내 먹고 싶다. 4월부터 심었던 내 텃밭 효자작물들의 100수 잔치가 끝없이 이어진다.
감자 100킬로, 오이 100개, 옥수수 100개들이 그들이다. 고추는 아마도 1000수를 넘을 것 같다.
울 엄마도 남편도 100수를 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과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