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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편지138

2022.9.2 신경림<길>

by 박모니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음양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죠. 심지어 절대자인 누군가도 그를 추앙하는 이들이 없이는 작동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대부분 밝은 빛으로 인쇄된 페이지만이 펼쳐지길 원해요. 어제 친척의 장례미사를 보면서 삶과 죽음이 가르는 극명한 대비를 순간적으로 느꼈어요. 동시에 제가 만드는 현재의 발걸음과 ’도중의 길‘이 보였어요. 최종의 종착지는 누구나 같은 곳을 향하나 그곳까지 가는 길의 모양은 수천만 갈래가 만들어져요. 단 하나의 길도 같은 모양이 없어요. 길을 만드는 이가 단 한 사람도 같지 않으니까요. 타인의 성스러운 죽음를 통해 살아있는 제 존재의 몸부림이 얼마나 먼지와 같은 지를 느낀 시간. 미사예식 내내 ’방하착(放下着)-집착을 내려놓아라‘이란 말을 되뇌였습니다.

오늘의 시는 신경림 시인의 <길>. 봄날의 산책 모니카


길 –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9.2 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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