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18 박인환<목마와 숙녀>
어제도 약속된 일을 마치고 하루를 접으니 밤이 되었죠. 책방에 돌아와 글 한 줄 써야겠다 싶었는데 피곤했던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답니다. 오래된 영화중 오드리햅번 주연,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곡 <Moon River>를 포함해서 부드러운 영화음악 몇 곡을 듣다가 잠이 들었네요. 몸은 자기가 체득한 활동의 양을 잘 기억하나봐요. 일찍 잤다고 일찍 일어나게 하니까요. 소위 총량의 법칙을 알게 하는 가장 정직하고 투명한 과학재료입니다. 다른 때와 달리 오늘 새벽소리는 인조음악없이 온전히 자연의 소리에 귀를 열어놓았어요. 그런데 왠지 더 가까이에서 오는 듯하여 실눈을 뜨고 보니 작은 귀뚜라미 한 마리가 창틀 안쪽에 있네요. 밖으로 나가겠다고 소리를 내나 싶어 살짝들어 내 보냈습니다. 오늘 눈 떠서 한 첫 번째 일이네요. 사실 오늘도 ’해야 할 일‘은 많아요. 그런데 왠지 ’심심‘하고 싶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심심이 아니라, 제 몸 안의 마음에 커다란 여유공간을 만들어 주는 ’심심深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맛있는 무미(無味), 화려한 담백(淡白)으로 채색되는 공간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라는 말에서처럼 내 안의 나 하나를 꺼내어 매우 깊고 간절한 ’심심(甚深)‘의 주인공으로 살아볼까 합니다.
오늘의 시는 박인환시인의 <목마와 숙녀>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 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어 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