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3 도종환<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엄마 매일 편지 잘 읽고있어. 근데 너무 엄마의 동선이 드러나는거 아냐?” 멀리있는 딸이 말합니다. “언니 매일 편지 잘 읽어요. 덕분에 받는 시와 시인도 알게 되고 필사도 해요.” 후배가 말합니다. 아침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특히 저의 매일 모습이 다 드러나니 투명해서 좋다는 사람, 시만 보내도 되지 않냐는 사람, 반응하는 사람도 제 각각입니다. 매일 조각글이라도 삶의 순간을 글로 써서 남기고자 하는 이 행위도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 모릅니다. 저의 사소한 일들을 편지에 쓰는 건, 먼 훗날 이렇게 살았노라고 저를 공증하는 일이지요.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좀 더 열심히 잘 살지 않을까 하구요. 저를 위해 들려주는 시 한편, 이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며 오늘도 꼴깍꼴깍하며 마십니다. 내일은 말랭이마을 9월 골목잔치-어린이동시잔치-가 있어요. 주말여행, 이곳 말랭이 골목따라 어머님들의 파전과 막걸리시음하며 즐겨보세요.
오늘의 시는 도종환시인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봄날의 산책 모니카.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아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