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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Life
당신만 생각했지
2020.9.9 브런치매일쓰기 12
by
박모니카
Sep 9. 2020
전날 밤의 천둥과 번개는 오고 간데없이, 또 한 밤을 조용히 맞는가보다 했다.
며칠 째 가보지 못한 텃밭을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꿈인가? 싶은 공간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흐흠, 오늘 밭에 가서 베어놓은 풀도 치우고, 퇴비도 섞어야 되는데. 다른 집들은 벌써 배추모종까지 길러서 심었는데. 큰일이네’ 혼자 중얼거렸다.
비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마음 따로 몸 따로인지, 갑자기 축 저치는 몸이 마음을 이겼다.
모르것다. 하루 늦게 한다고 난리가 날 것도 아니고.
어제 저녁 약속한 백숙 국물에 죽이나 끓여야 겠다 하며 일어섰다.
아침부터 포식하면 안되지 라는 마음에, 버섯과 삶은 감자를 썰어서, 쌀 몇 줌을 넣고 끓였다.
남편을 불러 “한 술이라도 먹읍시다”하며 흰 죽 한 그릇을 비웠다. 세수하면서 체중계에 올라가니 밤새 만들어진 공간 덕분에 체중이 약간 줄어있었는데, 이 죽 비우면 0.5킬로쯤은 늘겠지 싶었다.
먹고나니, 300그램 정도 숫자가 움직였다.
오늘의 일정에서 텃밭가는 것이 취소되었으니 이참에 시장에 가서 배추모종이나 보자고 했다.
텃밭살이 3년차 인데, 한번도 배추와 무는 심어본적이 없었다.
작년에 옆 밭의 지인은 푸지게 배추와 무를 거두고 자기들의 고춧가루로 김장을 했었다. 올 봄에 ‘또 다시 시작해보자’ 하는 맘으로 으샤으샤하면서 텃밭식구들이 준비한 밥과 함께 그 김장의 맛을 처음 보았었다.
진짜로 사각사각, 맛있게도 담었네라며, 젓가락질이 멈추질 않았었다.
한 여름의 작물들이 파장을 치고, 드듸어 배추와 무를 심을 때가 오니, 그 김장 맛이 생각났다.
고구마를 거둬낸 상단 밭에, 배추를 심고, 상추와 콩, 가지, 오이를 거둬낸 하단 밭에 무를 심을 예정이다.
초보 농사꾼 치고는 믿는 백이 있어서 언제나 수확할 양만 생각하는 욕심이 앞선다.
나의 믿는 백은 당연히 남편이다. 고향이 농촌이라고 촌놈이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않는 남편.
취직해서 집을 떠나 올 때 까지, 단 한번도 여름 방학에 놀러가지 않고 부모가 하는 복숭아 농사를 도왔다는 남편. 실전이 없어도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해박하여 많은 이들의 귀와 마음를 당기는 남편이다.
그런 남편이 4년전 뇌질환으로 아프기 시작하더니 체력이 주저앉았다. 무엇보다 시시때때로 마음이 내려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니 텃밭 가자는 내 말이 걱정스럽게 힘이 들 것이다.
아침에 산 배추모종 120개, 무 씨를 가지고 “내일 아침에는 꼭 일찍 일어납시다. 아들도 깨워서 얼른 끝내야지, 괜히 할 일을 미루니 마음이 답답해.” “그려, 내일은 해야지.” 힘없이 대답했다.
요즘 후배들과 약속한 시 필사를 위해, 지나온 필사노트를 또 보았다.
오늘은 정현종의 <방문객>이 다시 잡혔다.
소리내어 읽어보고, 타이핑으로 컴퓨터에 한번 더 쓰면서 시어를 음미했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도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읽고나니, 소파에 누워있는 남편의 뒷 모습이 보인다. 내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라는 글귀 위에 남편이 겹쳐진다.
얼마 전 딸과 정치 이슈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원아, 아빠가 이 정도는 되어서 괜찮지? 우리 딸이 궁금해 하는 것을 대답해 줄 정도는 되니까.”라고 말하던 남편.
그 말에 “이 정도라는 말로는 너무 야박하지. 네 아빠는 아깝지. 어디에 저런 해박한 지식을 담는지, 어떻게 잊지 않고 자기의 말로 이해시키는지, 신기할 정도야, 엄마 말이 맞지?”라고 추켜세웠다.
당연히 딸도 내 말에 크게 환대해주었다.
남편의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한다. 단지 지금 내 옆에서 지나가는 순간을 남편의 현재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순간을 잘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 뿐.
일부러 말을 걸어본다. “당신 무슨 생각해. 오늘도 다 끝났네.”
“무슨 생각은. 난 오로지 당신 생각만 하지. 고생했네 오늘도.”라고 대답한다.
나도 더 늦기 전에 같은 말로 대답해 줘야지. ‘하루종일 오로지 당신만 생각했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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