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킴이 대신 텃밭에 감자심는 아낙을 꿈꾸던 어제의 시간도 먼 옛일처럼 느껴지네요. 며칠전 남편이 밭을 갈았는데 봄을 들고 일어나는 풀들의 기세에 후다닥 갈퀴를 들었어요. 뒤따라온 후배가족 덕분에 비닐도 치구요. 처음 텃밭농사를 하는 후배는 새록새록 아기 숨 쉬듯 솟아나는 열무새싹을 보고 어찌나 기뻐하던지. 저의 텃밭지기 첫 모습이 떠올랐네요. 그때는 흙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만상(萬象)이 신비롭기만 했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요. 통감자를 씨눈 따라 잘라놓은 지 일주일. 따뜻한 햇빛과 바람 맞고 조각 감자씨들이 눈을 떠서 틔워낸 하얀 순. 이 씨앗감자가 뻗어나갈 뿌리, 감자꽃, 감자알을 생각하면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이제 감자씨를 심어볼까 하는데, 시동생의 전화. “형수님 오늘 낼 복사꽃 다 져요.” 비닐 친 땅에 습기도 더 가두고, 아직도 자고 있는 감자씨눈도 달랠겸, 감자심기는 다음날도 미뤘네요. 바로 과수원으로 갔지요. 벚꽃보다 더 진하고 고운 붉은 빛의 복사꽃. 이 꽃만 보면 돌아가신 어머님생각에 슬픔모드로 맘이 바꿔지는 남편의 기분을 알면서도 모른채 저는 꽃만 보고 다닙니다. 일부로 어머니가 주셨던 천상의 감도 100퍼짜리 복숭아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만 말하면서요. 올 봄도 이렇게 볼 꽃 다 찾아가며 보는 인생이네요. 꽃이 많으면 열매가 적다고 꽃을 따는 남편 손길 아래 풀 위엔 다시 복숭아꽃이 피어있었답니다. 사람 손이 먼저 닿아 제 명을 짧아진 그들에게 ’미안하다, 내 맘 속에서라도 열매맺어보자‘. 복사꽃과 시댁이야기 한편 쓰면 그 꽃도 서운해하지 않겠지요. 오늘은 복사꽃을 담은 두 편의 시를 들려드려요. 천양희 시인의 <이처럼 되기까지>와 정지상시인의 <술에 취한 후 (醉後)>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이처럼 되기까지 – 천양희
복사꽃 지고 나면 천랑성별이 뜬다지요
아침 무지개는 서쪽에 뜨고 저녁 무지개는 동쪽에서 뜬다지요
8초에 103음을 내면서 숲을 노래로 꽉 채우는 새가 있다지요
한 뿌리 여러 갈래인 나무에도 결이 있다지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요
누워 있는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것이 가로수라지요
잘못 자란 생각 끝에 꽃이 핀다지요 그것이 시라지요
이 세상에 옛 애인은 없고 세상의 꽃은 모두 아슬아슬하다지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지요
사랑할 때 사랑하고 생각할 때 생각하라지요
가난에는 과거가 없고 간절함에는 놀라운 에너지가 있다지요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점점 멀어진다지요
다음 어둠이 올 때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지요
이처럼 되기까지 인생은 얼마나 수고로웠을까요
술에 취한 후 (醉後) - 정지상(고려의 시인)
桃花紅雨鳥喃喃(도화홍우조남남) 복사꽃 붉은 비에 새들이 조잘거리고
繞屋靑山間翠嵐(요옥청산간취람) 집 두른 청산 사이에 나무가 무성하다
一頂烏紗慵不整(일정오사용부정) 오사모 하나 게을러 단정히 쓰지 않고
醉眠花塢夢江南(취면화오몽강남) 술 취해 꽃 제방에 잠들어 강남꿈을 꾼다
*烏紗帽(오사모):관복을 입을 때 쓰는, 사(紗)로 만든 검은 빛깔의 벼슬아치 모자. 단령(團領)을 입을 때 쓰는 것임. 현재는 구식 혼례나 폐백을 드릴 때 신랑이 씀.
시댁 복숭아과수원. 더 좋은 열매 하나 얻기 위해 이 넓은 곳의 꽃 눈을 일일히 다 따셨을 어머니가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