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8 김영랑<모란이피기까지는>/류시화<모란의연>
어느 길로 갈까 고민하던 제게 붉은 모란꽃송이는 유혹을 넘어 봄꽃의 최고봉 이구나 하는 확신을 안겨준 고밀도 순간포착 카메라 같았습니다. 모란 향기를 가득 안겨준 지인 덕분에 어제도 삶의 한순간을 잘 잡은 수집가가 되어서 기뻤지요. 삼월의 초봄이 안녕을 고한 지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사월의 봄도 제 손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가려 하네요. 아마도 오월 초원의 푸르름 속으로 데려다 주려나 봅니다. 신록우산 속에 눕기 전에 지금 솟아나는 여린 연두빛 이파리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습니다. 사월과 오월의 다리 사이를 무심히 건너가지 마시고 오고가며 얼굴 내미는 꽃들이 누구인지도 봐주세요. 향기로 말을 건네는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당신만의 아름다운 순간을 꼭 잡아보세요. 내일은 말랭이마을 4월 골목잔치가 있어서 쬐끔 분주하겠지요. 그런데 비 소식이 있군요. 저보다도 마을 어른들의 기대에 빗금이 내릴까 걱정되네요. 날이 너무 좋아도 군산을 벗어나고 날이 흐리면 흐리다고 움직이기 걱정되지만 그래도 여러분을 또 초대하고 싶습니다. 같은 곳 같은 행사처럼 보여도 세상에 같은 물결이 흘러갈 길은 없답니다. 물길도 다르고 그 물에 발 담글 사람도 다르니까요. 모란꽃을 선물 받은 김에 새로운 시를 찾았지요. 분명 작년에도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편지에 썼기에 다른 시를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모란‘에 대한 시는 역시 김영랑이 최고인 듯합니다. 이 시를 읽는 제 목소리도 저의 울림도 작년과 달라서 다시 한번 들려드립니다. 류시화 시인의 <모란의 연>과 함께 오늘은 두 편의 ’모란꽃‘ 시를 읽어보세요. 봄날의 산책 모니카.
모란이 피기 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의 연 – 류시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