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53

2023.6.10 김광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by 박모니카

숫자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듯, ‘오늘이 며칠이지?’하고 묻는 순간 젊은 날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역사적으로는 ‘6.10민주화 운동(1987)’이라고 부르는 오늘, 제가 다니던 대학가도 최루탄으로 가득했었어요. 그때는 전국의 대학가 뿐만아니라 소위 넥타이 부대라는 시민들의 항거로 대통령을 우리의 손으로 뽑는 직선제를 이루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고보면 소위 우리가 민주화라고 부르며 노력했던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네요. 저를 포함한 7080세대들은 유신독재멸망부터 오늘날까지, 민주화를 위한 과정 하나하나를 가장 분명히 기억하는 세대일 것입니다. 지금의 정권은 불에 데인 아이처럼, 무엇이든 거부하고 보는 이상야릇한 습성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 책임질께’가 아니고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할게’라는데요. 아직도 우리 사회의 권력은 책임감만 강하고 호령만 하는 가족 내 첫째 아이들 같아요. ‘책임’이라는 이성기제를 덮어줄 수 있는 것도 ‘부족함에 대한 인정’이라는 감성인데 그걸 모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가족의 만남, 부부의 만남부터 단순한 지인들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 서로를 책임져야만 한다면 참으로 힘든 만남일거예요. 나이들어 마디마디 부딪히는 관절의 삐거덕 소리만 들리겠지요. 무언가로 힘들 때 ‘내가 이런 것은 부족해’라고 인정한다면 아마도 관절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매끄러운 윤할류를 느끼지 않을까요. 오늘이 또 주말. 왠지 맘이 편해지는 두 글자 ‘주말’. 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으셨다면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보세요. 물리적 공간이 넓으면 마음의 공간도 넓어지구요, 꼬아있던 실타래를 풀기도 쉬워진답니다.

오늘은 김광규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1941-현, 서울출생)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타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6.10기억1.jpg
6.10기억2.jpg 책방위 벽화에도 희미한 옛사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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