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8 정호승 <그는>
‘신앙’ 이 두 글자가 무엇이길래 하나뿐인 목숨과 바꾸는데 웃음을 보일 수 있을까요. 제 딸은 세 살 때 세례를 받고 미카엘라 라는 이름을 받았지요.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날 역사수업을 하고 오더니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종교 이전에 역사야. 교과서에 나오잖아. 타인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도 문젠데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더 문제지.’ 전 가끔씩 이 말이 생각납니다. 특히 성지(聖地)를 가면 더욱더 ‘역사’라는 그 말이 와 닿습니다. 어제는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천주교조상들이 순교한 성지 두 곳을 다녀왔습니다. ‘천호성지’ 와 ‘초남이성지’입니다. 전북 완주군에 위치한 이곳에는 이 땅에 초기 천주교인으로 인류를 위한 ‘사랑’과 ‘기도’를 실천하며 제 목숨을 던진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순례기행이라는 말을 하기엔 한없이 부족한 발걸음을 주춤거리며 해설사가 전하는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들었습니다. 이곳에 처음 오는 곳도 아닌데, 유독 그들의 말소리와 믿음의 두 손이 보이는 건, 아마도 제가 달라졌기 때문일겁니다. 해마다 쓰고 싶은 글 시리즈가 있는데요, 어제 새로운 목표하나를 세웠습니다. ‘천호성지 103인의 성인을 나타내는 103계단에서 이제 성인 네 분을 만났으니,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야겠다’라구요. 새해가 오기 전인데도, 버킷리스트에 한 줄 올려놓습니다. 비단 천주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좋아하는 임금 중 하나인 ‘정조’, 학자 ‘정약용’ 등, 수많은 개화사상인들이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동학과 서학이라는 학문으로서의 천주사상 등, 역사공부한번 해보실까요. 재미있어요. ^^ 성지에 관한 궁금증은 소위 SNS박사님들이 다 알려주는 세상이니, 이야기책 읽듯 펼쳐보심을 권독합니다. 오늘도 말랭이마을 글방수업, 지역의 사진작가께서 특별히 사진수업을 해주신다고 해요. 저도 멋진 사진 찍는법 많이 배우고 싶어요. 정호승 시인의 <그는>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