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9 신달자 <쌀 한 톨을 그리다>
‘가슴 한구석에 헝크러진 서랍이 있습니까?’ 철학자 박구용씨의 질문을 들으며 잠 들었나봐요. 월요일이면 아침부터 정말 바쁜 일정으로 녹초가 되는데요, 그 와중에 이 말을 품고 위로했지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구멍이 많을수록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빛이 난다고 말해주는 그.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생방송에 나갈 말랭이 어머님 두 분이 낭독할 자작시를 같이 읽어보자고 했는데요, 자신들의 글이 너무 창피하다고 손사래를 치는 어머님들께 철학자의 말을 들려주려고 해요. 방송팀의 요구는 글을 배운 어머니들이 직접 시 한편 낭독했으면 했어요. 그동안 여러 주제를 가지고 썼던 감상글 한 편에서 불필요한 중복어들과 접속사들만 생략해드렸는데, 당신들이 봐도 진짜 ‘시 같은 느낌’이라고 으쓱해하셨죠. 처음엔 아무거나 제가 쓴 것을 낭독하겠다고 하셔서 ‘그런글은 가짜다. 직접 쓰신 글을 발표해야 진짜다’라며 어머님들을 독려했습니다. 당신들의 가슴속에 묻힌수 많은 감성(Sensibility)들, 글방수업을 통해 진실을 알았거든요. 제 역할은 엉켜있던 그들의 감정과 감성을 한올씩 풀어내도록 첫 자리를 찾아드릴 뿐이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설사 말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가슴 속 감성의 서랍이 있다면요. 들판에 있는 고개숙인 벼 이삭을 보면 나누고 싶은 누군가가 떠오르는 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도 하늘이 참 맑고 푸르렀는데요, 오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꼭꼭 여물어가는 벼 이삭의 낱알이 땅을 향해 경배하며 마지막 혼신의 기도를 할 때 제 응원의 시 한편 들려주고 싶어서요. 신달자시인의 <쌀 한톨을 그리다>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쌀 한 톨을 그리다 – 신달자
쌀 한 톨을 그리기로 했다
밥 아니라 마음을 먹고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은 생명의 주인
쌀 한 톨을 그리다가
쌀이 안 되고 터널이 되고 기차가 되고 먹구름이 되고
쌀 한 톨을 그리다가
쌀이 가마니가 되고 푸대가 되고 되가 되고 한주먹이 되고
몇 개의 종이가 찢어지고 늑대가 울고 몇 개의 밤이 뭉친 어둠이 지나가고
쌀 한 톨이 보이네
쌀 한 톨 안에 우주가 보이고
내가 밟고 자란 땅과 흙이 보이네
시든 잎 다 떨어지고 새잎 돋아나네
들판에 허리 구부린 자연의 주인
쌀 한 톨에 목숨이 열리는
희열이 보이네 노동이 만들어 가는 생명줄
인간의 무궁무진이 보이네
무더기가 아니라 하나의 존중이 보이네
천근의 쇠뭉치보다 더 무거운 한 톨 한 알의 무게
사라지지 않게 진하게 그리네
지구에 튼실하게 남게
행성에 떠돌지 않게
쌀 한 톨을 그렸는데 역사의 증언이 보이네
마음 안에 생명력이 퍼덕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