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168

2023.10.3 김추인 <쑥부쟁이의 천년가을>

by 박모니카

잘 놀수 있는 것도 재주랍니다. 9월에서 10월로 건너가는 다리 위에서 좋은 풍경과 좋은 사람들과 잘 놀고 있을까요. 멀리 떠난 여행은 아닐지라도 하루하루 다른 모습을 잘 섞어서 의미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벗들과 예약된 짧은 여행이 있구요. 철학자 칸트가 제시했다는 여행의 모습에서 제1단계는 ‘내가 무언가를 보는 능동자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보여지는 수동자의 모습’이라고 하네요. 적어도 그 모습으로 보여지는 시간은 사절하고 색다른 욕심을 가지고 떠나고 싶군요. 어제도 책방 둘레길을 좀 걸었는데요, 마치 가을 숲 문을 열고 밀고 들어가듯이 한발한발 걸었습니다. 기껏해야 3000보 정도의 짧은 거리였지만 그 속에는 가을바람, 가을 나뭇잎, 가을 새, 가을 하늘, 가을 구름, 가을사람이 가득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새로운 꽃 무리가 보여서 다가가니 보라색 꽃(쑥부쟁이인지, 개미취인지?)을 무더기로 심었더군요. 한 시절일지라도 저보다 훨씬 더 가을을 만끽하네요. 자유로이 팔 벌리고 흔들리며 웃고 있는 보라쟁이들이 부러웠습니다. 꽃들이야말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듣고 있겠지요. 사진이라도 찍으면서 잊지 말라고 제 냄새도 남겨놓고 왔어요. 돌아와서 쑥부쟁이를 노래한 시인은 누가 있을까 하고 찾아보기도 하고, 곧 출간할 지인의 글을 다시 읽어보며 공감의 리듬을 타기도 하고, 가을향기를 풍겨주는 피아노 연주 들으며 글 한두 개 쓰다보니 밤이 깊었더군요. 핸폰과의 거리를 멀리할수록 마음이 맑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요즘은 늦어진 일출, 빨라진 일몰덕분에 밝은 풍경을 담으려면 부지런해야 되지요. 오늘도 좀 부지런하게 움직여 마지막 연휴, 멋진 풍경을 담아두겠습니다. 김추인시인의 <쑥부쟁이의 천년 가을>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쑥부쟁이의 천년 가을 - 김추인


가을이사 붉든가 말든가

무더기 무더기 족속들의 꽃덤불 저기 두고

혼자 감감 낭떠러지 아래나 짚어보는

꽃아

불쟁이 딸아

벼랑귀를 잡고 서서 저를 보라 ─ 흔들어 쌓는 네 꽃짓,

눈이 시리다

가는 꽃모가지 치켜 하릴없이 구름송이나 세다

허옇게 늙어버릴 꽃아

떼 갈가마귀 구름장을 물고 잣봉을 넘으면

동강이 곧 시끄러워지겠는데

무슨 일이냐 쑥잎인 듯이 엎드려 크던 네가 문득

연보라 꽃잎 틔워 얹은 까닭이

뉘 오신다 전갈 있었더냐 뉘 언약 아니었더냐

네 젖은 꽃대궁들 일어서면 춤인데

바람이 먼저 읽고 천지 사방 소문내는 들국 향인데

두고 간 이승처럼 돌아와 가을볕에 나앉은

쑥부쟁이 꽃아

빛 푸른 솔울음도 네 천년 바래움도 휘어도는 물,

이쯤에서 묻었더냐

어라연, 얼비치는 저 물의 낯빛

뉘도 모를 비색(翡色)을 여기 와 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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