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175

2023.10.10 박남준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by 박모니카

추석부터의 긴 연휴가 끝났군요. 그 사이 벼 들판은 초록빛 경계가 사라지고 농후한 황금빛이되었네요. 그러나 저는 가을 색은 왜 이다지도 주름이 깊을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했습니다. 어느 연못에서는 푸르렀던 연꽃잎과 연밥이 제 할 일을 마치고 돌아선 모습. 너무 말라서 안타까워 사진 몇 장으로 남겨두었죠. 가을이 왔다고, 낙엽이 지는 모습을 두고 시인들은 가슴 울리는 시를 쓰겠지만, 눈부시게 화려했던 생명들이 잠시 자신을 내려놓겠다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외치는 그 소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대로 여름이 왔다가 가고 또 그런대로 가을이 왔다가 갈듯이, 무심한 듯 경외롭게 자연을 바라볼 뿐입니다. 저는 연휴동안 혹시나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볼까 생각했었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실천을 못했는데, 어제 만난 박남준 시인의 시를 읽으니 ‘가볼 것을...’하는 아쉬움이 맴돌아 시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행사에 들어가 기억에 남을 추억거리들도 만들어 마음 사진첩에 담아 놓았구요. 지인덕분에 며칠 전 주웠던 산 밤보다 더 크고 토실한 알밤을 맛있게 쪄서 나눠 먹기도 했지요. 마음속으로는 오늘부터 또 새롭게 살아가자고, 그게 사는 거라고 속삭이면서요. 사실 요즈음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해서 개운치 않은 날들이 많습니다. 기껏해야 A4 용지 절반도 되지 않는 아침편지 한 장 써 놓고, 매일 게으르고 부산한 생각으로 시간들을 도배합니다. 회복력을 단 용수철 하나를 빨리 찾아내야겠어요. 아니면 제 스스로에게 경을 치지 못하니 외부의 따끔한 회초리라도 구해야 될 거 같아요. 핑계를 대자면 이게 모두 진짜 가을이 와서 그런가봐요^^. 오늘은 아침부터 글쓰기 반 지인들의 글을 읽어보고 합평할 시간이 있네요. 자격에 취약한 제가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엄청 설익은 행위이지만, 더불어 배우는 좋은 시간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박남준 시인의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이라는 시를 들려드려요. 몇번을 읽어도 참 좋은 시네요. 봄날의 산책 모니카.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 박남준

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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